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인생을 꿈꾸며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불철주야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행복으로 가는 길은 산 너머 산,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고통과 불만족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망망대해 같다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행복을 찾는 일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특정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그 종교적 가르침 속에서 행복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신념을 통해 평안을 얻고, 절대자를 신앙함으로써 온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조건 따라 변하는 일시적 행복, 고통에 뿌리를 둔 불안전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조건 지어지지 않은 행복, 한계가 없는 행복, 고통의 종식을 통한 온전한 행복에 이르는 법에 대해 45년 동안 설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불만족의 토양에 뿌리내린 행복을 가장한 불안한 행복입니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의해 축조된,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행복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만족, 영원한 행복은 없습니다. 일시적인 만족, 일시적인 행복이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ㆍ불행의 조건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물질을 축적하면서 경쟁합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보호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마음은 항상 타인을 의식하며 즐거운 감각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입니다.
행ㆍ불행의 조건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행ㆍ불행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냅니다. 마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할 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에는 안과 밖이 없습니다.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밉고 고움이 없습니다. 대상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나ㆍ나의 것' 이라는 자아관념이 생겨납니다. 이와같은 그릇된 관념이 나와 너를 구분합니다. 나라는 관념이 세상 한복판에서 시시콜콜 많다 적다 밉다 곱다 시비분별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세세생생 윤회를 거듭하면서 내 마음에 맞는 행복을 찾아 헤메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내 마음에 맞는 행복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생기고 사라지고 변화하고 무너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릇된 자아관념은 무너지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나의 것이라 착각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영원한 만족을 갈구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계가 없는 온전한 행복, 조건 지어지지 않은 완전한 행복을 불교에서는 <닙바나(열반)>라고 합니다.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스러운 여덟 가지 닦는 길'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팔정도>의 중심에 <삼마-사띠>라는 도닦음이 있습니다.
<사띠>는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 매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주의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현상에 대해 매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주의주시하고, 자각하는 '사띠' 만으로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사띠>와 함께 <삼빠자-나>(Sampajāna)를 강조하셨습니다. <삼빠자-나>가 없는 <사띠>는 향기 없는 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모든 토대(몸ㆍ느낌ㆍ마음ㆍ담마) 위에서 <사띠>는 <삼빠자-나>가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유익하고 의미있는 <사띠>가 됩니다.
<삼빠자-나>는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을 설명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매우 중요한 수행용어입니다. <삼빠자-나>는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바른 삼매(집중)와 통찰지혜가 생게나도록 올바른 방법으로 <사띠>를 이끌어 줍니다.
테라와다 수행스승들은 수행을 지도할 때 반드시 <삼빠자-나>에 대한 법문을 합니다. 다양한 법문주제 가운데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삼빠자-나>입니다. 아래에 설명되어질 <삼빠자-나>에 대한 내용은 여러 수행수승들의 법문에 기초한 것입니다.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그 요의를 다시한번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빨리어 경전상에는 <팔정도>의 <삼마-사띠>(正念) 부분에 <삼빠자-나>라는 용어가 연달아 네 번 설해집니다.
"비구들이여, <바른 사띠>란 무엇인가?
여기 비구가, 몸에 있어서 몸을 관찰하면서
<열열한 노력>(Ātāpi) 과 <분명한 앎>(Sampajāna)이
갖추어진 <사띠>(Sati)를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 느낌에 있어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
...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
... 담마에 있어서 담마를 관찰하면서 ...
비구들이여, 이런 것을 <바른 사띠>(Sammā-sati)라 하느니라."
이와같이 <8정성도경>에서는 ‘기억ㆍ잊지않음ㆍ주시ㆍ놓치지않음ㆍ자각’의 의미를 지닌 ‘사띠’라는 용어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고, 노력(아-따-삐-)과 분명한 앎(Sampajāna)에 의한 사띠(Sati) 즉, 노력(Ātāpi)과 올바른 앎(삼빠자-노-)이 함께 작용할 때 진정한 의미의 <바른 사띠>(삼마사띠)가 된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념처경]에서는 4가지 알아차림의 확립, 즉 몸ㆍ느낌ㆍ마음ㆍ담마 가운데 몸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 부분에 <삼빠자-나>(正知, 분명한 앎)가 나옵니다.
"비구들이여,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앞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굽히거나 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대가사와 발우와 가사를 입고 잡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대소변을 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가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하느니라."
[디가니까야] 주석서의 복주에는 <삼빠자-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르게ㆍ완전하게ㆍ스스로 안다고 해서 <삼빠자-나>(Sampajāna)이다. 몸에 대해 거듭거듭 관찰하는 것이 느낌ㆍ마음ㆍ법(담마,사실)과 섞이지 않고 각각 잘 구분하여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으로 분명하게 스스로 알기 때문에 <삼빠자-나>라고 한다. 또한 모든 방면으로 완전하고 특별하게 안다고 해서 <삼빠자-나>라고 한다."
이와같은 복주서의 설명에 따라 <Sam>은 '바르게ㆍ완전하게ㆍ스스로', <pa>는 '다양하게ㆍ여러가지ㆍ특별하게', <jāna>는 '앎(知)'을 뜻합니다. 즉, 분명하고 다양하게 앎ㆍ올바르고 특별하게 앎ㆍ완전하고 다양하게 앎ㆍ스스로 다양하게 앎ㆍ스스로 특별하게 앎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앎ㆍ올바른 앎이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스스로 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앎'이란 지수화풍 4의 <고유한 특성>(무거움ㆍ가벼움, 차가움ㆍ따뜻함, 응집ㆍ흐름, 움직임ㆍ지탱 등)ㆍ<형성된 특성>(일어남ㆍ멈춤ㆍ사라짐 등)ㆍ<보편적 특성>(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 등 3가지의 특성을 단계별로 바르고ㆍ다양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분명한 앎>(삼빠자-나)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삿타까 삼빠자-나>입니다. <삿타카>란? 유용함ㆍ이익됨을 의미합니다. 신체적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그 말과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이로운 것인가 유용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령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파옵니다. 이때 고통을 참고 그대로 계속 앉아 있는 것과 다리를 펴서 고통을 해소시키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수행에 이익될 것인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삽빠야 삼빠자-나>입니다. <삽빠야>란? 적절성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려고 하는 말과 행동이 설령 유익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과연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적절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령 정기법회나 집중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집안에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것은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위의 두 <삼빠자-나>는 수행자는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지혜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이 2가지 지혜를 잘 활용하다면 매사에 실패하는 일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의 측면에서도 이 2가지 지혜를 갖추게 되면 집중력이 증장되어 순조롭게 위빳사나 통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고-짜라 삼빠자-나>입니다. <고-짜라>란? 수행대상을 의미합니다. 즉, 알아차림의 대상으로서 감각기관에 나타난 일체의 감각대상을 일컫습니다. 두 종류의 <고-짜라>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대상으로서의 <고-짜라>와 위빳사나 수행대상으로서의 <고-짜라>입니다.
특히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 측면에서의 <고-짜라 삼빠자-나> 예를 들어보면, 가령 탁발할 때 바루를 매고 마을로 걸어들어 갑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의 들어올림ㆍ나아감ㆍ내려놓음ㆍ닿음ㆍ누름이라는 신체적 감각대상이 나타납니다. 그 감각대상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집니다. 그 감각에 대한 분명한 앎, 그 감각의 생기고 사라짐에 대한 분명한 앎이 <고-짜라 삼빠자-나>입니다.
넷째, <아삼모-하 삼빠자-나>입니다. <아삼모-하>란? 무지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혹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걸어가고, 내가 옷을 챙겨입고, 내가 세수를 하고, 내가 밥을 먹고, 내가 손짓을 하면서 내가 상대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수행을 꾸준히 하다보면 수행대상에 대한 주의집중이 안정되고 강화됩니다. 그때 수행자는 발의 들고 가고 놓음 속에서 혹은 팔의 들어올림과 내림 속에서 신체적ㆍ물리적 현상의 일어남과 더불어 그 일어남을 아는 마음까지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즉, 발의 점진적인 움직임과 그 움직임을 인식하는 마음은 하나가 아닌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인식됩니다. 움직임은 물질이고 아는 마음은 정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걷기 직전의 걸으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그 결과로서 걸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결국 모든 행위 속에는 정신과 물질ㆍ원인과 결과만 존재할 뿐 나라는 실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수행자는 감각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속에서 감각현상들의 해체와 소멸을 보게 됩니다. 무상ㆍ고ㆍ무아 라고 하는 삼법인의 진리를 철견하게 됩니다. 드디어 <아삼모-하 삼빠자-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삼빠자-나> 란?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인 동시에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즉, 유익함과 시의적절함을 분명히 아는 것이고, 수행대상을 벗어나 헤매지 않고 수행대상에 잘 머무는 것이며, 무상ㆍ고ㆍ무아의 진리를 단순한 지적 수준이 아닌 체험을 통해서 올바르게 증득하는 것입니다.
<삼빠자-나>는 단순한 지적수준의 세속적 앎이 아닙니다. 현상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조명해 알고, 그 본질까지 분명하게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빠자-나>는 <지>(知, ñāṇa)인 동시에 <혜>(慧, paññā)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통해 올바른 방법으로 현상을 입체적으로 꿰뚫어 아는 '사람'을 <삼빠자-노->(Sampajāno)라고 합니다.
특히 수행자로서의 <삼빠자-노->는 피상적인 모습 즉, 관습ㆍ인습ㆍ명칭ㆍ개념 등으로 존재하는 세간의 진리(Sammuti sacca)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출세간의 진리(Paramattha sacca)까지 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세간의 진리 안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의 이름과 개성을 지닌 채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진리 안에서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만물은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합니다. <삼빠자-나> 지혜로써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를 꿰뚫어 볼 때 비로소 궁극의 해탈ㆍ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삼빠자-나> 지혜에 의해 고통의 근원이 뿌리뽑힘으로써 마침내 지고의 평온, 지고의 행복에 도달하게 됩니다.
<삼빠자-나>는 깊은 직관적 수준에서 모든 것들의 덧없는 본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삼빠자-나>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합니다. <삼빠자-나>는 <단순한 사띠ㆍ그릇된 사띠>를 <삼마-사띠>(바른 사띠)로 이끌어주며, <삼마-사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더욱 깊은 <삼빠자-나>가 계발됩니다.
이처럼 <삼빠자-나>와 <사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상호보완 작용이 극대화 될수록 <삼빠자-나>는 더욱 심오해지고 <사띠>는 한층 예리해집니다.이 두 능력의 결합이 바로 <사띠빳타나>(Satipatthana) 즉 <알아차림의 확립>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해탈ㆍ열반이라는 온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따마 붓다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고 있는 [디가니까야] <완전한 열반 경>(Mahāparinibbāna-sutta)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있어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탐욕심과 증오심을 버리고
<열열한 노력>(Ātāpi)과 <분명한 앎>(Sampajāna)과 함께
<알아차림>(Sati)하는 자 되어 머문다 ...
... 느낌에 있어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
...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
... 담마에 있어서 담마를 관찰하며 머문다 ...
아난다여, 이와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 혹은 여래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닦아나아가면
마침내 최상의 지혜로써 최상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일체중생들의 안락과 온전한 행복을 위해 입멸의 마지막 순간까지 법을 설하셨습니다. 중생들의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진리를 증득함으로써 마침내 궁극의 해탈ㆍ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분명한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고통의 온전한 소멸ㆍ지고의 행복에 이르렀습니다. 모두들 위없는 스승 고따마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길따라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근원을 뿌리뽑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대자유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불멸 2566(7)년 2월 9일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인생을 꿈꾸며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불철주야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행복으로 가는 길은 산 너머 산,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고통과 불만족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망망대해 같다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행복을 찾는 일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특정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그 종교적 가르침 속에서 행복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신념을 통해 평안을 얻고, 절대자를 신앙함으로써 온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조건 따라 변하는 일시적 행복, 고통에 뿌리를 둔 불안전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조건 지어지지 않은 행복, 한계가 없는 행복, 고통의 종식을 통한 온전한 행복에 이르는 법에 대해 45년 동안 설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불만족의 토양에 뿌리내린 행복을 가장한 불안한 행복입니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의해 축조된,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행복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만족, 영원한 행복은 없습니다. 일시적인 만족, 일시적인 행복이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ㆍ불행의 조건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물질을 축적하면서 경쟁합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보호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마음은 항상 타인을 의식하며 즐거운 감각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입니다.
행ㆍ불행의 조건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행ㆍ불행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냅니다. 마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할 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옵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에는 안과 밖이 없습니다.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밉고 고움이 없습니다. 대상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할 때 '나ㆍ나의 것' 이라는 자아관념이 생겨납니다. 이와같은 그릇된 관념이 나와 너를 구분합니다. 나라는 관념이 세상 한복판에서 시시콜콜 많다 적다 밉다 곱다 시비분별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세세생생 윤회를 거듭하면서 내 마음에 맞는 행복을 찾아 헤메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내 마음에 맞는 행복은 없습니다. 세상 만물은 생기고 사라지고 변화하고 무너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릇된 자아관념은 무너지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나의 것이라 착각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영원한 만족을 갈구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전제 자체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계가 없는 온전한 행복, 조건 지어지지 않은 완전한 행복을 불교에서는 <닙바나(열반)>라고 합니다.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스러운 여덟 가지 닦는 길'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팔정도>의 중심에 <삼마-사띠>라는 도닦음이 있습니다.
<사띠>는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 매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주의주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현상에 대해 매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주의주시하고, 자각하는 '사띠' 만으로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사띠>와 함께 <삼빠자-나>(Sampajāna)를 강조하셨습니다. <삼빠자-나>가 없는 <사띠>는 향기 없는 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모든 토대(몸ㆍ느낌ㆍ마음ㆍ담마) 위에서 <사띠>는 <삼빠자-나>가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유익하고 의미있는 <사띠>가 됩니다.
<삼빠자-나>는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을 설명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매우 중요한 수행용어입니다. <삼빠자-나>는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바른 삼매(집중)와 통찰지혜가 생게나도록 올바른 방법으로 <사띠>를 이끌어 줍니다.
테라와다 수행스승들은 수행을 지도할 때 반드시 <삼빠자-나>에 대한 법문을 합니다. 다양한 법문주제 가운데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삼빠자-나>입니다. 아래에 설명되어질 <삼빠자-나>에 대한 내용은 여러 수행수승들의 법문에 기초한 것입니다.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그 요의를 다시한번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빨리어 경전상에는 <팔정도>의 <삼마-사띠>(正念) 부분에 <삼빠자-나>라는 용어가 연달아 네 번 설해집니다.
"비구들이여, <바른 사띠>란 무엇인가?
여기 비구가, 몸에 있어서 몸을 관찰하면서
<열열한 노력>(Ātāpi) 과 <분명한 앎>(Sampajāna)이
갖추어진 <사띠>(Sati)를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머문다.
... 느낌에 있어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
...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
... 담마에 있어서 담마를 관찰하면서 ...
비구들이여, 이런 것을 <바른 사띠>(Sammā-sati)라 하느니라."
이와같이 <8정성도경>에서는 ‘기억ㆍ잊지않음ㆍ주시ㆍ놓치지않음ㆍ자각’의 의미를 지닌 ‘사띠’라는 용어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고, 노력(아-따-삐-)과 분명한 앎(Sampajāna)에 의한 사띠(Sati) 즉, 노력(Ātāpi)과 올바른 앎(삼빠자-노-)이 함께 작용할 때 진정한 의미의 <바른 사띠>(삼마사띠)가 된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념처경]에서는 4가지 알아차림의 확립, 즉 몸ㆍ느낌ㆍ마음ㆍ담마 가운데 몸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 부분에 <삼빠자-나>(正知, 분명한 앎)가 나옵니다.
"비구들이여,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앞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굽히거나 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대가사와 발우와 가사를 입고 잡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대소변을 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앎을 지니고
가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하느니라."
[디가니까야] 주석서의 복주에는 <삼빠자-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르게ㆍ완전하게ㆍ스스로 안다고 해서 <삼빠자-나>(Sampajāna)이다. 몸에 대해 거듭거듭 관찰하는 것이 느낌ㆍ마음ㆍ법(담마,사실)과 섞이지 않고 각각 잘 구분하여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으로 분명하게 스스로 알기 때문에 <삼빠자-나>라고 한다. 또한 모든 방면으로 완전하고 특별하게 안다고 해서 <삼빠자-나>라고 한다."
이와같은 복주서의 설명에 따라 <Sam>은 '바르게ㆍ완전하게ㆍ스스로', <pa>는 '다양하게ㆍ여러가지ㆍ특별하게', <jāna>는 '앎(知)'을 뜻합니다. 즉, 분명하고 다양하게 앎ㆍ올바르고 특별하게 앎ㆍ완전하고 다양하게 앎ㆍ스스로 다양하게 앎ㆍ스스로 특별하게 앎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앎ㆍ올바른 앎이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스스로 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앎'이란 지수화풍 4의 <고유한 특성>(무거움ㆍ가벼움, 차가움ㆍ따뜻함, 응집ㆍ흐름, 움직임ㆍ지탱 등)ㆍ<형성된 특성>(일어남ㆍ멈춤ㆍ사라짐 등)ㆍ<보편적 특성>(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 등 3가지의 특성을 단계별로 바르고ㆍ다양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분명한 앎>(삼빠자-나)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삿타까 삼빠자-나>입니다. <삿타카>란? 유용함ㆍ이익됨을 의미합니다. 신체적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그 말과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이로운 것인가 유용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령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파옵니다. 이때 고통을 참고 그대로 계속 앉아 있는 것과 다리를 펴서 고통을 해소시키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수행에 이익될 것인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삽빠야 삼빠자-나>입니다. <삽빠야>란? 적절성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려고 하는 말과 행동이 설령 유익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과연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적절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령 정기법회나 집중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집안에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것은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위의 두 <삼빠자-나>는 수행자는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지혜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이 2가지 지혜를 잘 활용하다면 매사에 실패하는 일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의 측면에서도 이 2가지 지혜를 갖추게 되면 집중력이 증장되어 순조롭게 위빳사나 통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고-짜라 삼빠자-나>입니다. <고-짜라>란? 수행대상을 의미합니다. 즉, 알아차림의 대상으로서 감각기관에 나타난 일체의 감각대상을 일컫습니다. 두 종류의 <고-짜라>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대상으로서의 <고-짜라>와 위빳사나 수행대상으로서의 <고-짜라>입니다.
특히 사념처 위빳사나 수행 측면에서의 <고-짜라 삼빠자-나> 예를 들어보면, 가령 탁발할 때 바루를 매고 마을로 걸어들어 갑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의 들어올림ㆍ나아감ㆍ내려놓음ㆍ닿음ㆍ누름이라는 신체적 감각대상이 나타납니다. 그 감각대상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집니다. 그 감각에 대한 분명한 앎, 그 감각의 생기고 사라짐에 대한 분명한 앎이 <고-짜라 삼빠자-나>입니다.
넷째, <아삼모-하 삼빠자-나>입니다. <아삼모-하>란? 무지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혹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걸어가고, 내가 옷을 챙겨입고, 내가 세수를 하고, 내가 밥을 먹고, 내가 손짓을 하면서 내가 상대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수행을 꾸준히 하다보면 수행대상에 대한 주의집중이 안정되고 강화됩니다. 그때 수행자는 발의 들고 가고 놓음 속에서 혹은 팔의 들어올림과 내림 속에서 신체적ㆍ물리적 현상의 일어남과 더불어 그 일어남을 아는 마음까지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즉, 발의 점진적인 움직임과 그 움직임을 인식하는 마음은 하나가 아닌 분리된 두 개의 실체로 인식됩니다. 움직임은 물질이고 아는 마음은 정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걷기 직전의 걸으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그 결과로서 걸음이 생겨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결국 모든 행위 속에는 정신과 물질ㆍ원인과 결과만 존재할 뿐 나라는 실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수행자는 감각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 속에서 감각현상들의 해체와 소멸을 보게 됩니다. 무상ㆍ고ㆍ무아 라고 하는 삼법인의 진리를 철견하게 됩니다. 드디어 <아삼모-하 삼빠자-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삼빠자-나> 란? 현상에 대한 바른 이해인 동시에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즉, 유익함과 시의적절함을 분명히 아는 것이고, 수행대상을 벗어나 헤매지 않고 수행대상에 잘 머무는 것이며, 무상ㆍ고ㆍ무아의 진리를 단순한 지적 수준이 아닌 체험을 통해서 올바르게 증득하는 것입니다.
<삼빠자-나>는 단순한 지적수준의 세속적 앎이 아닙니다. 현상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조명해 알고, 그 본질까지 분명하게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삼빠자-나>는 <지>(知, ñāṇa)인 동시에 <혜>(慧, paññā)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통해 올바른 방법으로 현상을 입체적으로 꿰뚫어 아는 '사람'을 <삼빠자-노->(Sampajāno)라고 합니다.
특히 수행자로서의 <삼빠자-노->는 피상적인 모습 즉, 관습ㆍ인습ㆍ명칭ㆍ개념 등으로 존재하는 세간의 진리(Sammuti sacca)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출세간의 진리(Paramattha sacca)까지 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세간의 진리 안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의 이름과 개성을 지닌 채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진리 안에서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만물은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합니다. <삼빠자-나> 지혜로써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를 꿰뚫어 볼 때 비로소 궁극의 해탈ㆍ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삼빠자-나> 지혜에 의해 고통의 근원이 뿌리뽑힘으로써 마침내 지고의 평온, 지고의 행복에 도달하게 됩니다.
<삼빠자-나>는 깊은 직관적 수준에서 모든 것들의 덧없는 본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삼빠자-나>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합니다. <삼빠자-나>는 <단순한 사띠ㆍ그릇된 사띠>를 <삼마-사띠>(바른 사띠)로 이끌어주며, <삼마-사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더욱 깊은 <삼빠자-나>가 계발됩니다.
이처럼 <삼빠자-나>와 <사띠>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상호보완 작용이 극대화 될수록 <삼빠자-나>는 더욱 심오해지고 <사띠>는 한층 예리해집니다.이 두 능력의 결합이 바로 <사띠빳타나>(Satipatthana) 즉 <알아차림의 확립>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해탈ㆍ열반이라는 온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따마 붓다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고 있는 [디가니까야] <완전한 열반 경>(Mahāparinibbāna-sutta)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있어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탐욕심과 증오심을 버리고
<열열한 노력>(Ātāpi)과 <분명한 앎>(Sampajāna)과 함께
<알아차림>(Sati)하는 자 되어 머문다 ...
... 느낌에 있어서 느낌을 관찰하며 머문다 ...
... 마음에 있어서 마음을 관찰하며 머문다 ...
... 담마에 있어서 담마를 관찰하며 머문다 ...
아난다여, 이와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 혹은 여래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되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닦아나아가면
마침내 최상의 지혜로써 최상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일체중생들의 안락과 온전한 행복을 위해 입멸의 마지막 순간까지 법을 설하셨습니다. 중생들의 오염된 마음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진리를 증득함으로써 마침내 궁극의 해탈ㆍ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분명한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고통의 온전한 소멸ㆍ지고의 행복에 이르렀습니다. 모두들 위없는 스승 고따마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길따라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근원을 뿌리뽑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대자유의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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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2566(7)년 2월 9일
천림산 기슭에서
메따와 함께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