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온(五蘊) 수행 》5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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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식온(識蘊, 의식의 다발, 앓음알이의 무더기) 


고따마 붓다께서는 인간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서 인식하지 않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으로 분리(해체)해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인간 개개 존재가 단지 5가지 집착의 다발(무더기)일 뿐이며, 그것은 조건을 따라 생겨나 조건을 따라 소멸하는 것으로서 그 어디에도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꿰뜷어 아셨습니다. 존재의 다섯 다발(무더기) 가운데 색(色)은 물질영역이고, 수상행식 4온은 정신영역으로서 식온(識蘊)이 맨 뒤에 놓여 있지만 식온(識蘊)은 앞의 4온이 각각의 온(蘊)으로서 제기능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합니다. 


즉, 식(識)은 지수화풍 4대의 고유한 성질을 알게 해주며(色), 6근이 대상과 접촉할 때 발생하는 느낌을 느낌으로 알게(受) 해줍니다. 또한 대상을 지각인식할 때 지각인식이 가능하도록 해주며(想), 일체의 정신적 행위가 일어날 때 그 행위(行)의 기저에는 반드시 識이 함께 작용합니다. 뿐만아니라 식(識, 의식, 알음알이)은  의근(意根, Mano-indriya)의 토대위에서 수(受, 감수작용) > 상(想, 지각인식) > 행(行, 의지작용)의 도움을 받아 접촉 대상을 최종적으로 판단ㆍ분별해서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식(識)에 기반하여 수ㆍ상ㆍ행이 일어나고, 수ㆍ상ㆍ행이 전달해준 정보의 토대 위에서 식(識)이 생겨납니다. 


식(識)은 행(行, Saṅkhārā)과 마찬가지로 문맥에 따라 다의적으로 나타납니다. 식(識)을 빨리어로 '윈냐나(Viññāṇa)'라고 합니다. '알다, 이해하다, 식별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Vi-jñā' 와 'aṇa'가 더해져 만들어진 명사입니다. 빨리어 경전에서는 <마음>을 일컬어 <찟따(Citta, 心>라고도 하고, <마노(Mano, 意)라고도 하고, <윈냐나(Viññāṇa, 識>라고도 일컫습니다. 그러나 <6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과 <오온(色, 受, 想, 行, 識)>과 오온의 윤회원리를 나타낸 <12연기법칙(無明, 行, 識 ....)>에서는 Citta(心)ㆍMano(意)와 구분하여 Viññāṇa(識)로 특정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心ㆍ意ㆍ識은 마음작용을 총칭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心ㆍ意ㆍ識 세 단어가 같은 뜻으로 혼용되거나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있지만, 셋 다 '대상을 안다'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주된 기능이 바로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아는 것은 心ㆍ意ㆍ識의 원초적 기능으로서 대상을 아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마음이 어떠한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마음은 매 순간 생멸을 거듭하면서 갖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탐욕ㆍ성냄ㆍ기쁨ㆍ슬픔ㆍ우울ㆍ불안ㆍ질투ㆍ의심ㆍ들뜸ㆍ혼침ㆍ절망ㆍ 희망ㆍ자애ㆍ연민 등등. 


빨리어 경전상에서 Viññāṇa(識)가 대상을 '알다, 알아차리다, 식별하여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빨리어 주석서 역시  Citta(心)를 그와같은 뜻으로서 3가지 측면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대상을 안다고 해서 Citta(心)라 한다.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Citta(心)라 한다.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Citta(心)이다]. 그래서 [단지 알고 있음ㆍ단지 알아차리고 있음] 그 자체만을 나타낼 뿐 그 외의 다른 의미는 일체 포함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心, Citta)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단지 '앎' 이라는 작용일 뿐, 접촉을 인연하여 생겨났다가 접촉이 끊어질 때 사라지는 것일 뿐  그 내부에 어떤 실존하는 자아가 있어서 행위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심(心, Citta)과 식(識, Viññāṇa)이 '대상에 대한 앎' 이라는 측면에서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하고, 빨리어 논장(아비담마)에서는 그 어떤 예외나 구분없이 혼용되어 나타납니다.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다양하게 일어난다 할지라도 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하나이며, 그 하나인 마음을 빨리어 논장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들을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하는데 89가지로, 더 자세하게는 121가지로 구분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 즉 마음들이 찰라적으로 생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따로따로 분리된 여러 유형으로 우리가 간파하지 못할 뿐입니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초기불전연구원) 


<오온>을 이해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18계(界, 6根ㆍ6境ㆍ6識)입니다. 6감각기관,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意, Mano)을 일컬어 6근(根)이라고 합니다. 또한 6근의 접촉대상을 일컬어 6경(모양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이라고 합니다. 6근(根)이 6경(境)을 만나는 순간 6식(識)이  일어납니다. 즉  눈이 시각대상을 만나면 보는 의식이 일어나고, 귀가 청각대상을 만나면 듣는 의식이 일어나고, 코가 후각대상을 만나면 냄새맡는 의식이 일어나고, 혀가 미각대상을 만나면 맛을 아는 의식이 일어나고, 몸이 촉각대상을 만나면 감촉의식이 일어나고, 마음이 마음대상을 만나면 온갖 심리의식이 일어납니다. 


6근 가운데 5근(눈, 귀, 코, 혀, 몸)은 <오온>의 색온(色蘊)에 해당합니다. 6근 가운데 마지막 근(根)이 의근(意根, Mano-indriya)입니다. 의근(意根)이 도와주지 않으면 5근은 스스로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5근을 통해 5감각대상을 의식(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의근(意根, Mano-indriya)입니다. Mano(意)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마음의 활동무대입니다. 식온(識蘊)은 Mano(意)를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는 의식의 다발(무더기)입니다. 그래서 식(識)을 일컬어 의식(意識)이라고도 합니다. 


<오온>을 이해할 때 6근ㆍ6경ㆍ6식과 더불어 또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12연기(緣起)의 법칙입니다. 12연기 법칙은 고따마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실 때 <오온>에 집착된 중생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생사윤회를 거듭하게 되는지, 어떻게 그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밝히신 법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12연기법을 발생하는 순서와 소멸하는 순서대로 관찰하셨습니다. 즉, 발생하는 순서대로 [무명>행>식>명색>6입>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무명>행>식>>>(윤회, 고통의 발생)]. 소멸하는 순서대로 [노사우비고뇌>생>유>취>애>수>촉>6입>명색>식>행>무명=>(해탈, 고통의 소멸)]. 


식(識, Viññāṇa)은 무명(無明, Avijjha)ㆍ행(行, Saṅkhārā)과 더불어 12연기 윤회의 기초가 됩니다. 물질(色)을 단지 물질로 인식하지 못하면(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물질을 항상한 물질로 보게 되면서 나의 물질이란 관념에 빠져듭니다. 느낌(受)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각인식(想)을 지각인식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의지작용(行)을 의지작용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들은 항상한 것이고 항상한 나의 것이란 관념에 휩싸이게 됩니다. 식(識, Viññāṇa)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갈애 멸진의 경>에는 식(識, Viññāṇa)과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이 상세히 설해져 있습니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실 때, 어부의 아들 사띠라는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릇된 견해가 생겼습니다. 즉, "제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의식(識, Viññāṇa)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에 세존께서 사띠 비구에게 물으시길 "사띠여, 어떠한 것이 의식(識)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이냐? 의식(識)은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나는 것. 조건 없이는 의식(識)이 생겨나지 않느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수행승(비구)들이여, 

의식(識)은 어떠한 것도 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 지어지느니라.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시각의식이라고 하느니라.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청각의식이라고 하느니라. 후각과 냄새를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후각의식이라고 하느니라. 미각과 맛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미각의식이라고 하느니라. 촉각과 감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촉각의식이라고 하느니라.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정신의식이라고 하느니라. 


예를 들어 수행승(비구)들이여,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지어진 것과 같느니라. 불이 장작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장작불, 나무조각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섶불, 쇠똥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쇠똥불, 왕겨로인해서 타게 되면 왕겨불, 쓰레기로 인해서 타게 되면 쓰레기불이라고 불리느니라. 비구(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의식은 어떠한 것도 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며,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이름 붙여지느니라." 


새벽녘 첫눈을 뜨는 순간에 의식(識, Viññāṇa)은 활동을 개시합니다. 그 어디서 그 무엇을 하든 조건을 따라 매 순간마다 6식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 식(識)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깊은 밤 잠들기 직전까지 그 활동은 계속됩니다. 가수면(선잠) 상태에서도 의식(識)은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숙면에 들었을 때 비로소 의식은 활동을 중지합니다. 수행(修行)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잠든 상태에서는 공부도 할 수 없고 수행도 할 수 없고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통한 지식의 축적이나 수행을 통한 지혜의 성숙은 깨어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무의식 상태'란 말이 있습니다. 아직 생명의 기능은 유지되고 있으나 의식활동이 일시 멈춘 상태입니다. 혹은 깊은 잠에 빠져서 의식활동이 잠시 멈춘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의식 개념과는 전혀 다른 '잠재의식'ㆍ'수면 아래 흐르는 의식' 이란 뜻로서 '바왕가(Bhavanga) 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왕가는 의식이 활동하고 있지 않은 '인식 대기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은 인식과정에 있는 마음과 인식과정을 벗어난 마음으로 구분해 볼 수 있 습니다. 바왕가(Bhavanga)란 6근과 6경을 토대로 진행되는 일련의 인식과정에 있어서 그 과정의 전과 그 과정 이후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즉 바왕가 상태에서는 인식(의식)하는 과정이 일어날 수 없으며, 인식(의식)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바왕가 상태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왕가는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수면 상태로서 이 상태에서는 마음(心識)이 표면활동을 중지합니다. 바왕가는 어떤 실체를 가진 잠재의식이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는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조건을 따라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고 조건을 따라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는 조건반사적 성향을 지닌 마음입니다. 인간의 사대육신은 6식의 활동무대인 동시에 6식의 수면공간입니다. 인간의 삶은 깨어있음과 깨어있지 않음의 연속이며, 앎과 모름의 끊임없는 반복입니다. 비몽사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있는 것도 아닌 마음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왕가 마음상태는 아니지만 바왕가에 준하는 마음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왕가 마음상태에서는 알아차림이 불가능합니다. 비몽사몽 상태에서도 대상을 (거의) 알아차림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은 깨어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에는 <아는 마음>(깨어있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깨어있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오온수행> 가운데 식온(識蘊)에 대한 관찰수행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일 때 모르는 마음상태, 즉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나 바왕가 마음상태에 떨어지는지를 알아야 하며, 어떠한 조건에서 아는 마음(인식과정)이 생겨나는지를 알아차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는 마음>에서 <모르는 마음>으로 <모르는 마음>에서 <아는 마음>으로의 전환을 명확히 알아차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성작용이 형성작용일 수 있도록 형성된 것을 계속 형성하고 있는" 그 행온(行蘊)의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있고,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는 그 의식의 무상성(無常性)과 무아성(無我性)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 단계의 <앎(識)>이 있습니다. 식(識)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 편의상 임의적으로 <앎(識)>의 단계를 구분해 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지각인식(想, 산냐)>입니다. 식(識)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으로서 <앎>의 단계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식(識)이 일어나기 직전 대상을 최초로 지각인식하여 식(識)의 완성을 돕는다는 측면에서 <앎>의 예비단계라고 이름붙여 보았습니다. 두 번째 단계가 <알음알이, 판단식, 결정식, 분별식>입니다.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수ㆍ상ㆍ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이 무엇인지를 판단ㆍ분별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보편적 앎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판단ㆍ분별해서 알게 된 것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입니다. 이것은 일상의 접촉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상대방과 소통하기 위한 분별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분별된 것을 더이상 분별하지 않고 '분명한 앓에 의해 아는 것' 입니다. 즉, 들뜬 마음으로 대상에 달라붙어(집착되어) 대상을 판단ㆍ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초연한 마음으로 '대상을 단지 대상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띠(잊지않음, 주의주시, 알아차림, 마음챙김)수행을 하다보면 접촉대상에 밀착되어 있던 마음이 어느 순간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기(알기) 시작합니다. 즉 '대상을 대상으로 아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그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 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둘중 한 사람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남은 한 사람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기능이 순일해지고 흙탕물같던 마음이 샘물처럼 맑고 고요해지면 알아차림의식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고 정밀해지면서 '아는 마음을 또다른 아는 마음이 뒤에서 지켜보는 앎'이 생겨납니다. 앎이 앎을 알고 그 앎을 또다른 앎이 지켜봅니다. 일순 앎이 사라집니다. 하나의 앎이 사라지면 뒤에서 지켜보던 앎이 사라지고, 그것을 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앎마저도 사라집니다. 그로인해 앎의 연속적 소멸을 보게 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대상과 대상을 아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아는) 앎' 입니다. 이를 일컬어 <통찰지(通察智)>라고 하며, 빨리어로 빤냐(Paññā)ㆍ냐나(ñāna)라고 합니다. 이 <앎(智)>은 <오온현상>을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로서 꿰뚫어 알게 해줍니다. 제행(諸行, 일체 현상, Sabbe-saṅkhārā)는 무상합니다. 식(識, Viññāṇa) 또한 무상합니다. 모든 것은 조건을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을 따라 소멸합니다. 이처럼 통찰지는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본래 괴로운 것을 괴로운 것으로 보게 해주며, 본래 영속적 실체를 가진 식(識)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러한 통찰지를 발판으로 하여 꾸준히 정진하다보면 마침내 도(道)의 지혜, 과(果)의 지혜를 증득함으로써 생사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정보의 바닷속을 유영하며 바쁘게 살아갑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혼동될 때도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부주의하게 정신없이 먹는다는 뜻이겠지지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보면 접촉이 발생할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대상을 왜곡해서 알거나 건성건성 어름어름 알게 됩니다. 대상을 왜곡해서 알면 오판을 하게 되고, 어름어름 알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몸이 일을 할  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일이 제대로 될 수 없고, 마음이 일을 할 때 마음이 하는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마음은 감각적 욕망ㆍ성냄ㆍ어리석음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림하는 것이 <오온수행>의 핵심입니다. 물체를 보고 있으면 그 보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소리가 들리면 듣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냄새가 나면 냄새맡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맛보고 있으면 맛보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몸이 접촉하고 있으면 접촉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마음이 일을 하고 있으면 그 일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아는 마음>에 대한 분명한 앎은 대상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고,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고통의 소멸에 이르게 합니다. 


호흡을 관찰하다보면 차츰 호흡이 미세해지면서 호흡의 감각이 사라지고 몸의 감각도 사라집니다. 알아차릴 몸이 일시적으로 소멸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거친 마음이 가라앉고 미세한 마음만이 생겨났다 사라집니다. 마침내 그 미세한 마음마저 사라집니다. 이제 더이상 알아차릴 대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앎>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이때 수행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흡도 사라지고, 신체감각도 사라지고, 그 어떤 심리현상도 일어나지 않을 때의 알아차림 대상은 바로 그 <앎>입니다. 그 앎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다보면 그 앎마저도 사라지는 순간이 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릇된 알아차림으로 인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마치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은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의 연속입니다. 대부분 <모르는 마음>을 <아는 마음>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름어름 아는 마음>과 <분명히 아는 마음>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르는 마음>을 <모르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아는 마음>을 <아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면서,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한 순간도 잊지 않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림 하다보면,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 그 접촉을 아는 마음에 대한 분명한 <앎(識)>이 생겨나고, 분명한 앎과 함께 통찰지(智)가 생겨나서 마침내 몸과 마음의 모든 현상을 고(苦, Dukkha)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탐욕(갈애와 취착)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달아 그 사슬을 끊고 해탈로 나아가게 됩니다. 


          * 


"비구들이여, 

의식(識, Viññāṇa)은 머무는 동안에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에 의해서 머물게 되느니라. 그것은 물질(色, Rupa)적 요소를 대상으로 하고 물질적 요소에 확립되고 즐거워함을 의지하여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을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의식은 머무는 동안에 감수작용(受, Vedanā)에 대한 탐욕에 의해서 머물게 되느니라. 그것은 감수작용을 대상으로 하고 감수작용에 확립되고 즐거워함을 의지하여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을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의식은 머무는 동안에 지각작용(想, Saññā)에 대한 탐욕에 의해서 머물게 되느니라. 그것은 지각작용을 대상으로 하고 지각작용에 확립되고 즐거워함을 의지하여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을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의식은 머무는 동안에 형성작용(行, Saṅkhārā)에 대한 탐욕에 의해서 머물게 되느니라. 그것은 형성작용을 대상으로 하고 형성작용에 확립되고 즐거워함을 의지하여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을 얻느니라.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물질적 요소와도 다르고 감수작용과도 다르고 지각작용과도 다르고 형성작용과도 다른 의식이 오거나 가거나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성장하거나 증장하거나 성숙하게 되는 것을 천명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물질적 요소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대상이 끊어지고 의식은 확립되지 않니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감수작용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대상이 끊어지고 의식은 확립되지 않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지각작용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대상이 끊어지고 의식은 확립되지 않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형성작용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대상이 끊어지고 의식은 확립되지 않느니라.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식별작용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대상이 끊어지고 의식은 확립되지 않느니라. 


비구들이여, 

의식(識)이 확립되지 않고 증장하지 않으면 의도적 행위(行)를 행하지 못하고 해탈하느니라. 해탈하기 때문에 평정하고 평정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며 갈애가 일어나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드느니라.  


‘태어남은 끝났다. 

 청정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루어졌다. 

 이 상태 외에 다른 삶은 없다.’

 라고 알게 되느니라.” 


                                          <  [S22:53] <Upaya-sutta(속박 경)>


              * 


  불멸 2565(6). 9.  .

  천림산 기슭에서 

  자애와 함께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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