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수행의 유익함 / 냐나로까 스님

관리자
2024-12-23
조회수 77

현대는 참으로 바쁘게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바쁘게 사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함인데, 행복이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한 이해 없이 외부로부터 행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마음의 구조와 역할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마음의 구조와 역할을 이해하는 실천적 행위가 곧 수행입니다. 따라서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수행을 통해서만 행복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행복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수단보다 우선적으로 수행을 삶 안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수행을 통하여 얻는 삶의 유익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이 수행의 유익함을 초기 단계에서 일부 수행자들은 분명하게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띠와 삼매가 깊어져 지혜의 맛을 조금씩 보게 되었을 때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유익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분명하고 안정되어 평안해지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불분명한 마음의 상태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마음이 선명하지 못하고, 확실하지 않으나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으며 들떠 있습니다. 또한 온갖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불분명하며 불안한 마음속에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상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탐욕이라고 하는 열렬한 바람이 있기 때문에

격렬하거나 미세한 성냄이 있기 때문에

미혹이라는 이해의 부족 무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만스러운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을 때,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들떠 있을 때, 또한 온갖 생각이 일어날 때, 불안한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의 상태와 작용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집중하여 바로 그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마음은 여러 가지 작용을 하지만 한 순간에 한 번만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동시에 여러 마음 작용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음이 작용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 작용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알아차려서 밀착하여 관찰하면’,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작용은 멈추게 됩니다. 나아가서 그 부정적인 마음의 원인인 열렬한 바람 혹은 격렬하거나 미세한 화가 사라집니다.


더욱 ‘알아차려서 밀착하여 관찰’로 나아가면 수행자의 마음은 안정과 평안 그리고 평온과 평화로움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더욱 수행이 진보되면 탐욕과 성냄 그리고 미혹의 원인인 무지의 뿌리가 점점 잘려나가 마침내는 매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업(業)을 점점 제거시켜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되다


업(業)은 빨리어로 깜마(Kamma)인데,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라는 용어로 우리에게 더 친숙해져 있습니다. 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술하자면 매우 많은 것들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요점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불평등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인류가 불평등한 원인을 물리적 원인·유전인자·환경의 조건 등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 가정의 구성원 서로 환경이 비슷하고, 특히 쌍둥이는 같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하는데 기질적·지능적·감성적으로 다른가? 위에서 말한 이유들로는 이러한 것들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 혹은 ‘자아’라고 할 때, 5온(pañcakkhandhā, 五蘊), 즉 물질 무더기(rūpakhandha, 色蘊), 느낌의 무더기(vedanākhandha, 受蘊), 산냐의 무더기(saññākhandha, 想蘊), 상카라의 무더기(saṅkhārākhandha, 行蘊), 윈냐나의 무더기(viññāṇakhandha, 識蘊)의 무더기인 존재를 실재적 존재 ‘나’ 혹은 ‘자아’로 상정을 한 것입니다.[미주1] 여기서 5온 중의 행, 즉 우리의 의도 그리고 행위가 업이며, 또한 업을 형성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身)·구(口)·의(意)로 지은 의도적 행위가 업이며, 업을 형성한다는 말입니다. 비자발적·무의식적·비의도적으로 행하여진 행위는 과보는 있으나 업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도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마음 통찰의 위빳사나 수행의 몫입니다. 이 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스트레스에 자유로워지다


현대사회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갖가지 힘, 즉 스트레스를 가해오고 있습니다. 그 압력을 우리들로서는 감당해낼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문명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필립 짐 바르도라는 심리학자는 그의 저서 『심리학과 삶』에서 사람이 주변 환경에서 받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대해 반응하는 네 가지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감정적인 단계: 슬픔, 의기소침, 성냄, 짜증, 좌절감

② 행동의 단계: 생산성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건망증이 있으며,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

③ 생리적인 단계: 주로 신체적인 긴장을 말하는데 이것이 발전하면 통증, 위궤양 고혈압 등 갖가지 질병이 된다.

④ 인지의 단계: 자신을 지나치게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한 경우, 그 결과 자기 자신이 아무 쓸모없고 희망도 없다는 감정에 빠져들어 최악의 경우 자살까지 하게 된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스트레스와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은 강한 자아의식으로 인하여 자아에 집착하여 마음이 불분명해져서 균형 잡히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이유는 마음이 탐욕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격렬하게 화를 내게 이끕니다. 또한 이해의 부족, 무지 때문에 탐욕이 일어납니다. 탐욕은 무지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사띠하여 관찰하는 순간에는, 수행자는 어떤 것에 대한 기대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렬한 집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 통찰을 하는 동안은 절대로 성냄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 통찰을 하는 순간에는 수행자가 게을러지거나 혼침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정진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탐욕·성냄·무지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분명해져 있으며 따라서 마음이 균형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질병이 치유되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고, 맥박과 혈압이 올라가고, 근육에 혈액이 증가됩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어떤 신체적인 위협에 대처하거나 위험으로부터 도망가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속 이와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이와 상관되는 질병의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신체의 맥박을 줄이고, 긴장을 누그러뜨립니다. 많은 의학학술 보고들이 명상 수행의 건강효과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명상 수행은 특별히 고혈압·과민성 대장 증후군·불면증·우울증 같은 스트레스와 연결되는 질병과 통증 그리고 불안증이 곁들여 있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의학자들은 고혈압 환자들이 명상 수행요법을 통해서 혈압과 맥박을 낮췄을 뿐만 아니라 좁아졌던 심장동맥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고 보고 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명상 대신 휴식요법을 시행했던 환자들은 혈압은 낮아졌으나 관상동맥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보고도 아울러 참고할 만합니다. 건선 환자 중 자외선 치료만을 받은 환자보다 명상 수행요법을 함께 받은 환자의 피부가 더 빨리 깨끗해졌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연구는 명상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 원인으로 인한 통증(특히 근육에서 오는 통증)과 불안을 적게 느꼈고 약물도 적게 사용하였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신경내분비계에 대한 약물치료 영향을 조사해 온 연구자들은 명상 수행이 혈액 속에 멜라토닌과 노화방지제로 간주되는 호로몬 함량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수행자의 정진이 향상되어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āñāṇa)가 일어나 그 중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지혜(Udayabbayānupassanāñāṇa)’라는 단계에 도달하면 그때 여러분들의 사띠의 힘은 매우 강하게 되어서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육체적 통증이 극복되며 나아가서 갖가지 질병이 치료되기도 합니다. 온갖 약과 전문 의사도 치료하지 못했던 불치병이나 오랫동안 고통 받아 왔던 심각한 병들이 수행자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선정의 힘이 매우 깊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에 도달하면 그 병이 말끔히 치유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다


죽음이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고통 중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정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지금 여기서 받아들이기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도피해 버리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 조건 지어진 존재들은 누구도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에게 기도를 하여도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은 회의적이며 또한 편안한 죽음에 대한 보증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감각기관들이 하나씩 생명력을 잃어감에 따라 외부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자기 억제력 역시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가면들은 벗겨져서 완전히 발가벗은 자기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증오·질투·시기·미련·질시·분함·아쉬움·집착·공포 등의 부정적 감정들과 마주치며, 죄의식·회환·비탄·슬픔 등에 빠져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죽음이 말할 수 없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는 이상 그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삶의 본질과 자기 자신의 내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깨달음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을 공부하고 이해하면 보다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띠(maraṇassati)를 익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에 임박하여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불안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통찰하면 불안함은 없어지고 나아가서 계속하여 ‘일어남 사라짐’의 주 대상을 관찰하면서 평화 속에서 그대로 죽음의 과정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며 마침내는 평온 속에서 죽음의 위대한 경험을 치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평소에 살아왔던 방식과 마음을 안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제의 나의 삶의 양상이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의 나의 삶의 양상이 그대로 내일 나의 죽음의 양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나의 죽음은 오늘 나의 삶의 양상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수행으로 잘 준비되어 있으면, 죽음 또한 아무 두려움·회한·미련·집착 등에 끄달리지 않고 평온과 평화 속에서 성스럽게 진행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상위의 지혜가 계발되다


열심히 정진한 수행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높은 수준의 지혜가 계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전에 높은 수준의 담마(Dhamma, 法)를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수행을 통하여 청정의 과정과 지혜의 단계들을 경험하게 되므로, 다시 동일한 진리의 가르침을 대했을 때, 어렵지 않게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됨에 경이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진리, 즉 존재의 본질과 실상을 깨닫는 지혜의 개발에는 세 가지 단계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념적 이해: 언어를 통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둘째는 추론적 이해: 언어를 통하여 개념적으로 알게 된 내용을 이성적으로 계속 주시하여 논리적인 방법으로 추리와 유추를 통하여 모순을 점검하며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셋째는 몸과 마음을 통한 실천적인 경험을 통한 이해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가장 확연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의 인식의 과정은 그 이전의 오염된 인식에 의해서 대상을 알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류에서 해방된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평등심, 즉 다섯 감각기관이 대상에 부딪혔을 때 그 대상에 애착하지도, 혐오하지도 않는 무지가 제거된 마음의 중립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지혜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란 바로 이러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수행이기 때문에 계발된 지혜를 얻게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열반을 성취하게 되다


위빳사나 수행의 최대의 유익함은 존재의 본질과 실상을 확연하게 깨달아 모든 번뇌를 제거한 대자유인이 되는 열반의 성취입니다.


열반(nibbāna, 涅槃)은 일반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환경이나 상황으로부터의 탈출보다는 그것에 얽매여 있는 ‘나’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열반이란 번뇌의 타오름이 꺼지듯이 아무것도 조건 지어져 생성됨이 없는 평화와 자유의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뜻에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란 열반을 말한다. 그것으로 인해 갈애가 시들고 소멸하기 때문에 ‘시들어 소멸’이라 한다. 그것으로 인해 ‘버림’ 등이 있고, 감각적 욕망의 집착들 중 단 하나의 집착도 없기 때문에, ‘버림·포기·집착 없음’이라 한다. 그것은 고요함이 특성이고, 영원함이 역할이며, 편안함을 만드는 역할이며, 표상없음으로 나타나고, 생각의 전개 없음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열반을 성취한 이들을 네 쌍(cattāri purisayugāni), 여덟 분의 성자들(aṭṭha purisapuggalā, 四雙八輩)이라 하며, 구체적으로 ‘수다원(sotāpanno)·수다원과를 실현하여 증득한 이(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사다함(sakadāgāmī)·사다함과를 실현하여 증득한 이(sakad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아나함(anāgāmī)·아나함과를 실현하여 증득한 이(an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아라한(araham)·아라한과를 실현하여 증득한 이(arahatta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입니다.


이러한 성자들 중, 아라한 이전의 성자들은 아직 더 닦을 것이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 유학(sekha, 有學)이라 하며, 아라한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이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 있는데, 유학이 성취한 열반을 유여열반, 무학 즉 아라한이 성취한 열반을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을 실현하여 증득한 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의 ‘멸성제’를 설명하면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러한 성자들로 이루어진 상가에 대하여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습니다.


“세존의 제자들의 상가(saṃgha)는 잘 증득하고(suppaṭipanno),

세존의 제자들의 상가는 즉시 증득하고(ujuppaṭipanno),

세존의 제자들의 상가는 바른 방법으로 증득하고(ñāyappaṭipanno),

세존의 제자들의 상가는 가르친 대로 증득하니(sāmīcippaṭipanno),

곧 네 쌍·여덟 분의 성자들(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상가는 공양 받아 마땅하고(āhuneyyo),

칭찬 받아 마땅하고(pāhuneyyo),

보시 받아 마땅하고(dakkhiṇeyyo),

공경 받아 마땅하며(añjalikaraṇiyo),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시다(puññakkhetta, 福田)”.


우리는 항상 이러한 상가의 덕을 계속 생각해야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수행의 유익함에 대한 대강을 살펴보았습니다.


- <사띠빳타나 수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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