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집중수행 기본 교재 2 - 위빳사나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사깜마
2024-10-12
조회수 196

◈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위빳사나 수행교재』

(2017년 2월. 마하보디선원 집중수행교재)


-- 차례

-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 초급 과정 : 좌선, 경행, 입선, 와선, 일상의 알아차림

- 좌선

- 경행

- 입선(入禪)

- 와선

- 일상의 알아차림

- 중급 과정 : 느낌의 관찰


3. 입선(入禪)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들은 서 있는 시간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서 있으면 신체도 건강해지기 때문에 스님은 입선을 자주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 집중수행을 한다고 결심했다면 5분 정도 입선을 합니다. 

그 경우에도 양 손은 앞이나 뒤로 부드럽게 마주잡고 안정감이 있도록 어깨 넓이 정도 다리를 벌리고 섭니다. 

서 있으면서 발바닥이 지면에 닿아있는 감각을 먼저 느끼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서있음’ ‘서있음’이라고 명칭을 붙입니다.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정말로 간단합니다. 

서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이것만큼 간단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서서 발바닥으로 아 과연 서 있구나라고 느끼며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 후 마음이 안정되어 알아차림의 힘이 강해지면 호흡을 알아차리십시오.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 ‘일어남’ ‘사라짐’하며 호흡의 들이쉬고 내쉼을 알아차리십시오. 

만약 경행을 하다가 돌아서기 위해 멈추어 섰을 때나, 돌아서고 나서 멈추어 있을 때도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합니다.

‘서있음’ ‘서있음’하며 서 있는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호흡의 들이쉬고 내쉼을 ‘일어남’ ‘사라짐’하며 알아차리고, 

다시 서있음’ ‘서있음’하며 서 있는 상태를 확인하도록 해야 합니다.

 

 

4. 와선(臥禪)

 

와선은 누운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인데, 주로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또는 저녁에 잠을 잘 때, 누운 채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은 그날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며,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우면 몸이 최대한으로 이완되기 때문에 호흡이 잘 나타나서 호흡을 보기가 쉽고, 또한 자려고 누웠을 때는 다른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몸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좋습니다. 

 

이렇게 매일 잠들기 전 정신이 혼미해질 때 알아차림을 하면 죽을 때도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에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으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재생연결식이 깨어있어 지혜롭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상태와 같은 파장의 몸과 마음이 생기므로 그 삶은 지혜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와선에서 생긴 알아차림은 다음 생의 질을 결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와선하는 방법

 

1) 아침에 일어날 때 알아차리기

 

① 누운 자리에서 잠을 깬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② 누운 상태에서 일어남, 사라짐의 호흡을 얼마간 알아차리다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을 보면 편안하거나, 들떠있든가, 어떤 걱정을 합니다. 이때 그 마음을 보아주고 잠깐이라도 호흡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은 사라지고 다시 청정한 마음이 됩니다. 하루의 시작을 알아차림으로 출발하면 그 좋은 파장이 하루를 좋게 이끌어 갑니다. 

 

2) 저녁에 자기 전에 알아차리기

 

① 잠자리에 누운 상태로 잠을 청하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② 침대에 닿아있는 몸의 부분 부분을 알아차려 내려갑니다.

③ 그다음 얼굴, 목, 가슴, 배를 알아차리다가 배에서 호흡이 잡히면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다가 자연스럽게 잠이 듭니다. 

 

와선을 하면 금방 잠이 드는데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잠이 들면 숙면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잠들기 전 알아차림으로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잠들었기 때문에 악몽을 꾸거나 선잠을 자지 않습니다. 

 

만일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잠을 못자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앉아서 좌선을 합니다. 좌선을 하다가 졸음이 오면 자연스럽게 누우면 됩니다. 불면증이 있을 때 잠이 못 잘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자꾸 여러 생각을 일으켜서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불면증일 때는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다음 호흡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낮 동안에 알아차림이 잘 이어져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있었으면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때는 아침까지 와선을 하면 좋습니다. 이 경우 잠을 자지 않았어도 모든 피로가 풀려있기 때문에 가볍고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밤새 깨끗한 마음의 작용인 알아차림을 했기 때문에 몸도 깨끗한 상태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3) 일상적인 와선 수행법

 

와선은 몸이 피로해 있을 때나 병이 났거나 혹은 취침 전이나 깨어날 때에 합니다. 똑바로 누워서 배 위에 손가락을 포개어 살며시 내려놓고 우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주십시오. 

맨 먼저 오른쪽 다리, 왼쪽 다리 어느 쪽을 먼저 관찰하든 발뒤꿈치가 방바닥에 닿아있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렸으면 그 의식을 엉덩이를 향하여 엉덩이가 방바닥에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하나씩 천천히 알아차림 하면서 엉덩이 다음은 무릎, 손등, 어깨, 머리를 차례대로 알아차려 나갑니다. 

의식이 머리까지 도달하면 다음은 역으로 머리로부터 어깨로 내려가서 차례차례로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아있는 상태까지를 알아차립니다. 

 

한 바퀴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면 자신이 누워 있는 전체 모습으로 마음을 옮겨서 ‘누워 있음’ ‘누워 있음’ ‘누워 있음’이라고 3회 정도 명칭 붙여 알아차림 한 후에 배의 호흡을 관찰합니다. 

배의 팽창 수축에 맞추어 ‘일어남’ ‘사라짐’하며 3분 정도 관찰한 후, 다시 발뒤꿈치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을 신체의 위쪽으로 향해 알아차려 나갑니다. 

도중에 망상이나 가려움이 나타나는 경우는 그것을 알아차림 합니다. 

졸음이 찾아오면 ‘졸음’ ‘졸음’ ‘졸음’하며 알아차려 졸음 같은 것은 날려 버립니다. 

 

이것은 잠자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워서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점을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밤에 그대로 잠들고 싶을 때에는 실제로 졸음에 역행하지 않고 ‘잠이 듬’ ‘잠이 듬’ ‘잠이 듬’이라고 관찰하고 그대로 자 버려도 됩니다. 아침까지 푹 잠들 수 있습니다.

 


5.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

 

1) 일상생활이 모두 수행할 기회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하루 15시간 이상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활동하는 자신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면 수행이 빠르게 발전합니다. 다행히 위빳사나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므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알아차림이 가능합니다. 알아차림에는 돈이나 시간이 들지 않고, 단지 알아차리겠다는 의지와 실천만 필요합니다. 

 

수행자에게 일상의 알아차림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활 속에서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되도록 많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립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도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동합니다. 일상생활은 대상에 휘둘려 알아차림을 놓치기가 쉽기 때문에 더욱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일상에서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알아차리면서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 행동을 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아는 지혜가 뒤따라옵니다. 

 

알아차림을 많이 한 사람은 지혜의 힘이 좋아져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선업이 됩니다. 그래서 아직 위빳사나의 지혜가 높지 않아도 스스로 나쁜 행동을 하지 않게 되고, 나쁜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계를 어길 정도의 불선업을 짓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려 이익이 되는 생각은 하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항상 마음이 먼저 생각을 하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을 알아차리면 그 일이 옳은가 그른가를 알아서 적절하게 행동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행위를 알아차리기

 

아침에 잠에서 깨면 먼저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어서 호흡을 몇 번이라도 알아차린 뒤에 일어납니다. 이때 몸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방문을 열고 닫는 것, 화장실에 가는 것, 세면장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는 것, 목욕을 하는 것 등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또한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할 때 알아차립니다.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거나, 침묵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대소변을 볼 때까지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매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때 ‘지금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현재로 돌아와서 알아차림을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일하는 현장에 마음을 두면 됩니다. 저녁에 잠을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호흡을 주시하면서 잠을 자야 합니다. 

 

4) 음식을 먹을 때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는 대부분 탐심을 가지고 먹습니다. 그래서 먹을 때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 ‘탐욕으로 먹는가’, ‘성급하게 먹는가’, 아니면 ‘편안한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린 뒤에, 만일 탐심이나 성급한 마음이 있다면 일단 먹는 것을 중지하고 그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다시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려서 탐심이나 급한 마음이 사라졌을 때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탐욕을 먹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지금 무슨 마음인가?’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린 뒤 우선 먹을 것을 ‘봄’ ‘봄’ ‘봄’하며 알아차리면서 명확히 대상을 잘 관찰합니다. 

그리고 젓가락을 잡으며 ‘젓가락 잡음’, ‘옮김’하며 젓가락을 옮기고, ‘잡음’ 하며 먹을 것을 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음식을 ‘가져옴’ ‘입에 넣음’ ‘손 내림’ ‘씹음’ ‘씹음’ ‘씹음’ ‘맛을 봄’ ‘씹음’ ‘씹음’ ‘맛을 봄’ ‘삼킴’ ‘삼킴’ 이라고 모두 알아차리면서 먹습니다. 

만일 무슨 소리가 귀에 들리면 ‘소리 들림’ ‘소리 들림’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입에 넣은 것을 다 먹고 나면 다시 젓가락을 쥐고, 옮기고, 잡고, 옮기고, 입을 열고, 넣고, 손 제자리로 돌아오고, 씹고, 맛보고, 삼키고.. 라고 알아차림을 계속해 나갑니다. 행위를 모두 명확히 순서대로 알아차려 나갑니다. 

 

꼭 식사 시간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음식을 보았을 때, 과자를 먹을 때, 그럴 때마다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때마다 ‘성급한 마음이 있는가!’, ‘탐심이 있는가!’, ‘배가 부른데도 많이 먹으려고 하는가!’ 등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탐심은 아주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알아차려서 급한 마음이 없어지고 편안해졌을 때 먹어야 알아차리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에 마음을 두지 말고 자신의 눈과 코와 혀에 마음을 두고 먹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여러 반찬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자꾸 탐심이 일어나서 급하게 먹게 됩니다.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을 탐색하며, 음식을 흘리고, 몇 번 씹지도 않고 급하게 삼키거나, 아직 삼키지도 않았는데 다시 음식을 입에 넣기도 합니다. 또한 남의 몫까지 먹습니다. 이 모두가 탐심을 가지고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탐심을 먹기 때문에 탐심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음식은 탐욕으로 먹지 말아야 하고, 또한 음식을 이름으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닭고기, 돼지고기, 과일 등 음식의 모양이나 이름에 빠져 먹지 말고, 그 음식의 고유한 맛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의 모양이나 이름은 관념이고 음식의 맛은 실재입니다. 음식의 이름은 변하지 않지만 그 맛은 순간마다 변합니다. 만일 고급요리라는 모양에 빠지면 알아차림을 놓치고 과식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맛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각각의 고유한 맛이 있으므로 수행자는 음식의 고유한 맛을 알아차리고, 그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냐 싫어하는 음식이냐에 따라 탐심과 성냄이 일어나는데, 그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먹어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면 좋거나 싫거나 하는 마음 없이 차분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을 하면서 먹게 되고, 적당히 알맞게 먹게 될 것입니다. 

 

5) 낮에 활동하면서 알아차리기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자신의 발걸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생각하면 생각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발걸음을 알아차립니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립니다. 또한 다른 직원들의 언행에 대해서 시비 분별하는 자신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직장에서 가장 바르고 적절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실수가 적어지고, 일의 능률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다면 매순간 일어난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속아서 자신도 모르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없는 순간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도 많아집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위빳사나 수행법 중 중요한 다른 하나는 평소 걸을 때의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집중적 수행법에서도 경행을 설명했지만 그것은 확실히 수행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 그 시간에 중단 없이 상세하게 관찰하며 걷는 수행입니다. 일상의 걷는 수행은 가벼운 기분으로 평소 걸을 때에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걸을 기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대인이라고 걷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지하철 등의 교통기관이 매우 발달해 있지만 정류소에서 자신의 아파트까지 혹은 집에서 슈퍼마켓까지 등등 걷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게 걸을 때에 이 시간은 위빳사나 실천에 사용하도록 정해 놓으십시오. 

 

어떤 식으로 하는가 하면, 그저 단순히 발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고 명칭 붙이며 걷기만 하면 됩니다.

걸을 때 맞은편에서 누군가 사람이 오면 사람이 ‘다가옴’ ‘다가옴’ ‘왼쪽으로 비킴’ ‘왼발’ ‘오른발’하며 왼쪽으로 비켜 주십시오. 그 사람이 왼쪽으로 비키면 오른쪽으로 ‘비킴’ ‘왼발’ ‘오른발’하며 계속 걸어갑니다. 

신체의 감각을 맛보면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고 걸으면 매우 즐겁습니다. 마치 디스코에서 춤추는 것처럼 즐겁습니다. 

디스코든 어디든 무엇이든 여러분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려 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대단히 즐겁습니다. 

 

걸으면 곧 피로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그런 사람은 걸으면서 어두운 생각을 합니다. 걸을 때 나라는 사람은 늘 바보 같은 짓만 하고, 어쩌고저쩌고 투덜투덜 후회하면서 걸으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매우 피로해집니다. 그러므로 피로한 것입니다. 혹은 걷는 것도 싫어집니다. 그러지 말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고 걸으십시오.

그러나 무언가 주문을 외우듯이 그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는 것은 안 됩니다. 수행은 주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므로 왼발이라고 하면 왼쪽 발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신체도 그에 응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오른발이라고 하면 확실히 오른쪽 발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신체도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며 걸으십시오. 

 

그때 소리가 들린다면 ‘소리 들림’ ‘소리 들림’이라고 알아차림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소리의 종류를 찾지 않도록 하십시오. 

쓸데없는 것은 혼란만 될 뿐이므로 어떤 소리이든 들리고 있다고 알아차림만 하면 됩니다. 그편이 자신을 느긋하게 해줍니다. 

하나하나 소리를 추적하지 말 것. ‘들리고 있음’ 만으로 끝내십시오. 

 

일전에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런 식으로 걸으면 사람과 부딪치거나 차에 부딪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사띠를 하고 있다가 차에 부딪쳤다는 사람이 있으면 데리고 와 보십시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차에 부딪친다고 하는 것은 사띠가 없기 때문입니다. 혼란되어 마음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차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사고를 일으키거나 하는 사람은 위빳사나를 하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술에 취했거나 사띠가 없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사띠를 하니까 천천히 걷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쎄요. 

천천히 걷는 쪽이 꼼꼼히 사띠를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매우 빨리 걸어도 사띠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걷지 않으면 안 될 때야말로 나는 철저히 사띠로 걷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피로해져서 걸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사띠를 하지 않고 걸으면 아무리 빨리 걸어도 망상이 생깁니다. 

나는 걸을 때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꼼꼼히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이라고 알아차림 하지만, 빨리 걸어도 사띠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걸을 때에는 언제나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고 걸어 주십시오. 

 

그 외에도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모든 행위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때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과 의도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현재를 알아차리는 노력으로 하루 종일 일과 수행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선원에서 좌선이나 경행으로 알아차림이 숙달되면, 일상에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알아차림이 이어지는 수행자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이 힘이 수행자를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자주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어, 실제로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려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실제 알아차리는 행위가 없다면 이는 망상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이때라도 생각을 알아차리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알아차리면 다시 위빳사나 수행이 시작됩니다. 

 

6) 일상의 알아차림이 주는 이익

 

일상생활의 수행법도 진지하게 하면 집중적 수행법과 동일한 정도의 효과가 있습니다. 집중수행법은 일주일간 진지하게 계속하면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의 수행법으로는 한 달 정도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정말로 한 달간 이 수행법을 확실히 실천한다면 인간이 변화합니다. 

 

수행자가 일상에서 모든 행위를 알아차림과 함께하면 번뇌가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안정된 마음은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품을 보게 합니다. 이처럼 일상에서 항상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주의를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팔정도를 닦아가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수행자를 언젠가는 불사不死의 문,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7) 일상의 알아차림은 분명한 앎과 함께

 

일상의 알아차림은 대념처경의 분명한 앎을 닦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의 분명한 앎 편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갈 때나,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나,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대가사와 다른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대 소변을 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가고, 서고, 앉을 때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도, 말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분명한 앎은 일상의 행위에 대한 네 가지 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첫째, 지금 자신의 이 행위가 이익이 있는가?

둘째, 지금 자신의 이 행위가 시기 상황이 적절한가?

셋째, 지금 대상이 적절한가? 지금 적절한 수행 주제를 지니고 있는가?

넷째, 지금 대상을 어리석지 않게 보는가? 대상을 나와 연관시켜보는가? 대상을 무상, 고, 무아의 측면에서 보는가?

 

이것이 네 가지 분명한 앎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차려서 마음집중하여 관찰합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의 대상에 대한 관찰에 적용됩니다.

 

‘가’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➀ ‘가’라는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립니다. 

➁ ‘가’ ‘가’라고 「명칭」을 마음속으로 붙이며 그 현상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➂ ‘가’의 현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관찰합니다. 

➃ ‘가’의 현상을 관찰하는 동안 ‘가’의 실재적인 성품인 ‘나’를 알게 되면 그 현상을 알아차립니다. 

➄ ‘가’의 실재적인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 나’라고 「명칭」을 붙이며 그 현상에 집중합니다. 

➅ ‘나’의 현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그 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관찰합니다. 

➆ ‘나’가 실재적인 현상이며 고유한 성품임을 이해합니다. 

➇ 그 현상을 이해하고 나면 주 관찰대상인 배의 ‘일어남’ ‘사라짐’ 현상관찰로 즉시 돌아옵니다. 

 

이와 같이 ‘가’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관찰하는 동안(➀〜➂) 그 관찰을 통해 관찰의 순간마다 반드시 그 현상 ‘가’의 실재적인 성품인 ‘나’가 드러나서 그것을 이해(➃〜➆)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의 알아차림이 성숙되면 언젠가는 자연적인 실재하는 담마의 참 성품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경우에는 ➀⇒➁⇒➂⇒➇의 순서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무릎에 ‘통증’이라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➀ 무릎에 통증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립니다.

➁ ‘통증’ ‘통증’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그 통증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➂ 그 통증이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대개 알아차림 하면 통증이 증가하다가, 지속하다가, 그리고는 서서히 사라집니다. 

수행자의 관찰이 면밀히 진행된다면 통증이란 실재하는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빤냐띠)이며, 사실적으로 실재하는 것(빠라맛타)은 ‘열’ 혹은 ‘쑤심’ 혹은 ‘저림’ 혹은 ‘땡김’이라는 현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알고 이해하게 되는 담마 중의 하나입니다. 

 

통증의 내용이 만약 ‘쑤심’이라고 알았다면, ‘통증’에서 ‘쑤심’으로 명칭을 바꿔서 관찰해야 합니다. 

➃ 실재하는 현상으로 쑤심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➄ ‘쑤심’ ‘쑤심’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그 쑤심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➅ 그 쑤심이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합니다. 

쑤심이 처음에는 약하게 진행되다가 점점 강해졌고, 열이 발생하였고, 한참 후 서서히 약해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쑤심이 일어난 그 부위가 뻐근하였는데 쑤심이 사라짐에 따라 점차 뻐근함도 사라졌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연하게 알았다. 

➆ 그래서 쑤심이 실재적인 현상이며 고유한 성품임을 이해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행관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렇게 하여 쑤심의 통증이 사라지면 즉시, 

➇ 배의 ‘일어남’ ‘사라짐’ 현상관찰로 돌아옵니다. 

 

뻐근함, 단단함은 地(흙)와 水(응집성)의 요소입니다. 열의 발생은 火(열기)의 요소입니다. 쑤심은 風의 요소입니다. 

수행자는 쑤심이 일어나는 부위가 ‘나’의 몸이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요소들의 작용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쑤심이라는 존재가 그곳에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변화를 이루면서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행자는 아직은 거칠지만 ‘무상’이라는 성품의 단면을 경험한 셈이 됩니다. 담마란 오묘하고 애매모호한 초월적인 ‘그 무엇’이 결코 아님을 안 것입니다. 

 

결국 수행자가 현재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을 이어가면 거기에는 분명한 앎이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행위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은 새의 양 날개처럼 함께 있습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175?tc=shared_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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