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테라와다불교사(25)/이사장 빤냐와로스님

관리자
2021-04-21
조회수 657

작성일 : 13-10-21 15:35 


5. 제 1차 결집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상가가 분열될 위협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꼬삼비의 두 비구스님간의 다툼과 부처님의 사촌 데와닷따(devadatta)와의 대립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돌아간 후에 상가 분열의 위기나 담마의 그릇된 해석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그룹 중의 하나인 수밧다(subhadda)라는 비구스님은 부처님이 완전하게 열반하신 것을 슬퍼하고 있던 비구스님들의 모임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스승께서는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구스님들은 부처님에게 더 이상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연장자인 마하깟사빠(Mahākassapa) 스님이 수밧다의 이 의견을 들었을 때,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담마는 쇠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개의 piṭaka(Sutta와 Vinaya)를 편찬하려는 의도로 비구스님들의 결집모임을 청했습니다. 이 첫 번째의 모임이 제1차 불교결집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결집의 동기가 진정한 담마의 쇠퇴 가능성에 대한 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흥미롭습니다. 후에 미륵불(Metteyya Buddha) 이론의 발전 또한 그런 식의 의견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하깟사빠 스님은 부처님의 가사를 받은 유일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연장자 스님으로서의 권한으로 제1차 결집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두타행 수행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승보다 더 새 가사를 입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과 옷을 교환했습니다. 후에 어쩌다 일어난 이 일이 권위 양도의 상징적 의식이 되었습니다.)

  아난다는 최초의 불교결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낭송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25년 동안 부처님을 시봉한 수행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그에게 시자를 요청하자 아난다는 어떤 조건만 허락되면 기꺼이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조건 중의 하나는 부처님이 무슨 설법을 하던 그에게 다시 반복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난다야말로 제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낭송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sutta)은 “Evaṁ me suttaṁ(에-왕 메- 숫땅)” 이라는 구절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내(아난다)가 들은 바로는” 이라는 뜻입니다.  


붓다의 열반 날짜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빨리어 자료에 의하면 대략 BC 483년이었습니다. 독일 학자 Bechert는 BC 400년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승불교 구전에서는 매년 우기의 끝에 경전(sutta)에 점을 찍어 기록한 중국의 시대 계산 표시법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BC 380년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자료에 제1차와 제3차 불교결집만 있고, 테라와다 구전의 제2차 결집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BC 380년 이 해는 대승불교 구전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100년 후에 열린 제2차 결집을 BC 3세기로 보기 때문입니다(아소까왕 시절). 그러나 대승불교 쪽에서도 진정한 담마의 쇠퇴론(말법사상)을 주장하는 천태종에서는 예외입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담마의 쇠퇴는 AD 1055년에 시작되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1,500년 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그것은 테라와다 자료의 BC 483년을 지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입멸 날짜 규정의 중요성은 그리스, 중동, 중국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불교가 더 이상 인도나 동남아시아만의 종교가 아닌 국제적인 종교인 이상, 불교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역사적 사실과의 비교는 불가피합니다. 그것은 또한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발생한 시점에 대한 논쟁과도 뚜렷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이로운 점은 만일 우리가 부처님 탄생의 날짜를 명확히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불교경전에 있는 많은 신화적인 이야기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쉽게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제1차 불교결집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결집은 부처님 열반 3개월 후에 열렸습니다. 결집의 목적은 불제자들의 지침서로서 두 개의 모음집(Dhamma와 vinaya)을 편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집을 전후하여 비구스님들 사이에 대립과 이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1차 결집을 열게 된 동기가 수밧다 스님의 발언으로부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집을 마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뿌라나(Puraṇa)라는 스님에게 그 결집에 만족하는지 물었습니다. 뿌라나 스님은 “나는 결집에서 편찬한 모음집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들은 담마만을 따를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이끈 제1차 불교결집에서 두 개의 모음집(Ānanda에 의한 dhamma와 Upāli에 의한 vinaya)은 성공적으로 편찬되었습니다. 500명의 아라한들이 그 결집에 참석하도록 뽑혔습니다. 그리고 함께 낭송함으로써 그 편찬을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1차 결집에 대한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부처님은 모든 그룹에서 아라한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비구니 스님은 초청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이미 아라한에 도달한 재가자들이 초청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제기되는 질문들에 의해 우리는 제1차 불교결집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이라도 출가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포살(uposatha) 의식은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따로따로 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포살이 진행될 동안에는 비록 아라한에 이른 재가자라 하더라도 그 의식에 참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보수적인 비구스님들이 주축이 된 결집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재가자들에 대한 그릇된 대접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의지와 동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엔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제 1차 결집에 아난다는 부처님의 주시봉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을 들어서 아는 최초의 연장자 스님이란 점을 모든 비구스님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뽑혔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는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을 시봉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그는 부처님께 너무 인간적으로 가까웠을 것입니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아난다에게 아라한이 되라고 다그치자 그가 얼마나 빨리 아라한이 되었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경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Suttantika)이나 율(vinaya)을 계속 암기하는 다섯 명의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디가바나까(Dighabhāṇakā), 맛지마바나까(Majjhimabhāṇakā), 상윳따바나까(Saṁyuttabhāṇakā), 앙굿따라바나까(Anguttarabhāṇakā) 그리고 위나야다라(Vinayadhara)가 그들입니다.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를 위한 전문가는 생략되었습니다.

디가바나까(Dighabhāṇakā)에 의하면 아난다는 걸어서 혼자 결집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맛지마바나까(Majjhimabhāṇakā)에 따르면 땅 속으로 돌진하더니 결집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난다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묘사는 테라와다 구전에서도 아라한의 미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경우들이 삼장(Tripiṭaka)에서 발견됩니다.

 

그런데 제1차 결집에서 아난다는 경(sutta)을, 우빨리는 율(vinaya)을 암송할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경들은 유명한 문장 “evam me suttaṁ” (me=Ānand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되며, 언제 부처님이 그 장소에 머물고 계셨고 누구에게 설법을 하셨는지를 나타내는 두 번째 문장이 뒤따라 나옵니다. 한 학자가 이런 종류의 경전에 나오는 도시 이름의 횟수를 세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웨살리(Vesāli)라는 도시가 1,000번 이상 언급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라자가하(Rājagaha) 역시 빈번히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는 작은 마을보다는 주로 큰 마을에서 설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제1차 결집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살(uposatha) 날에 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은 서로 따로 모여 계본(pāṭimokkha)을 독송하였습니다. 재가자 상응부(Gahapati Saṁyutta)에서 언급한 아라한을 이룬 재가 신도들 또한 있었습니다. 처음에 상가라는 말은 빅쿠(bhikkhu), 빅쿠니(bhikkhuni), 우빠사까(upāsaka), 우빠시까(upāsika), 네 그룹의 모든 불자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데 있어 그들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재가자들은 가정을 가진 사람들로서 스님들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뿐이라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 출가가 더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해석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선 출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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