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테라와다불교사(22)/이사장 빤냐와로스님

관리자
2021-04-21
조회수 668

작성일 : 13-10-21 15:30 


사란다다 경은 500명의 신심이 깊은 릿차위 사람들의 결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상호 토론에서 종교적인 설법이 포함되기를 바라고 있던 그들은 한 남자에게 그 길을 지나가시는 부처님을 캠프로 모셔오기 위해 길에서 기다리도록 시켰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의 설법을 존경하여 따르는 많은 유명한 릿차위 사람들에 대하여 듣자마자 삿짜까 니간타가 논쟁을 할 의도를 가지고 부처님에게 왔습니다. 많은 릿차위 젊은이들이 당시에 그를 따랐습니다.  

하루는 많은 명성 있는 릿차위 사람들이 잘 꾸민 마차를 타고 부처님을 보기 위해 웨살리 숲으로 왔습니다. 숲을 지나면서 그들은 매우 소란했습니다. 수행을 하고 있다가 방해를 받은 우빠짤라 스님, 깍까따 스님 그리고 다른 많은 스님들이 숲을 떠나 가까운 고싱가 살라 숲으로 갔습니다. 이와 같은 많은 이야기들로부터 우리는 릿차위 왕자들이 가는 곳마다 언제나 그룹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웨살리에 있는 궁중 무희 암바빨리의 망고 정원에 계신 동안 그녀는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보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암바빨리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매우 행복했습니다. 도중에 그녀의 마차는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인 릿차위 사람들의 마차와 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께서 다음날 공양을 위해 그녀의 집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일 그녀가 그 초대를 자신들에게 양보하면 10만 금화를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암바빨리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웨살리를 다 준다고 해도 그 초대를 양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웨살리라는 도시가 니간타 나타뿟따의 활동 중심지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불교가 융성하기 전에 대부분의 릿차위 사람들은 니간타 나타뿟따 공동체의 추종자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문교를 결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7대 왓지 왕의 통치 후에 웨살리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웨살리의 모든 왕자들이 만장일치로 부처님을 모셔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처음으로 부처님께서는 웨살리에 오시게 되었고 설법을 하시는 동안 84,000명이 경청했습니다. 2주를 웨살리에 머무르신 후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로 돌아가셨습니다. 대부분의 탁월한 릿차위 왕들은 이런 설법을 들은 후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에게 너무 헌신적이어서 공회당(산타가라)에 모여서도 부처님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루는 릿차위 왕자가 공회당에서 부처님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자 니간타 나타뿟따의 열렬한 추종자인 시하세하빠띠가 부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설법에 깊은 감명을 받고 부처님에게 귀의했습니다.

  릿차위 왕 옷탓다는 영혼의 영원한 존재를 믿는 철학의 확고한 추종자였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감명을 받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다른 경들을 집중적으로 찾아 본 결과 다음에 열거하는 릿차위 사람들이 부처님의 충실한 제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①미할리 릿차위 ②마하나마 릿차위 ③밧디야 릿차위 ④시하 릿차위 ⑤아바야 릿차위 ⑥빤디따 꾸마라 릿차위 ⑦둠무카 릿차위 ⑧난다까 릿차위 마하맛트야 ⑨시하세나빠띠 

웨살리에 살고 있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 중에서는 다음에 열거하는 분들이 언급할 만한 분들입니다.

비구 스님들은

①왓지뿟따까 비구 ②안자나와니야 테라 ③수야마 테라 ④삐얀자하 테라 ⑤와사바 테라 ⑥왈리야 테라 ⑦왓지뿌따까 테라

비구니 스님들은

①젠따 테리 ②시하 테리 ③와셋티 테리 ④로히니 테리 ⑤암바빨리 테리 ⑥위말라 테리 


왓지 공화국의 도시들


왓지 공화국은 부처님 시대 인도에 있던 16개국 중의 하나였습니다. 왓지 공화국의 마을과 도시들 몇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욱까쩰라 ②꼬띠가마 ③나디까 ④웰루와가마 ⑤반다가마 ⑥보가가마 ⑦깔란다까가마 ⑧핫티가마 ⑨암바가마 ⑩잠부가마 ⑪보가나가라 ⑫뿝밧지라 또는 뿝바윗자나 혹은 뿝바위라 ⑬뿝바윗자나 ⑭왁구무다나디 

빨리 경전은 왓지 공화국이 때때로 경험했던 기근과 융성했던 시기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왓지(릿차위) 공화국은 기근이던, 기근이 아니던 상관없이 언제나 번성했습니다. 때로는 이웃 나라들과 전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빔비사라의 승리담은 릿차위 사람들이 갠지스 강 건너에 위치하고 있던 마가다 왕국과 끊임없는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석서의 해석자인 붓다고사는 갠지스 강 기슭에 빳따나라고 불리는 포구가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 포구의 절반은 마가다 왕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나머지 반은 릿차위 공화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상품들 특히 히말라야 지방으로부터 양념류가 포구에 도착하면 릿차위 사람들이 먼저 차지했습니다. 마가다 왕국은 언제나 뒤쳐졌고 그래서 왓지 공화국과 마가다 왕국 간의 다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세니야 빔비사라 왕이 죽은 후에도 아자따삿뚜는 왓지 공화국을 침략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공화국과 싸우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은 릿차위를 무찌를 최상의 전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수상 왓사까라 바라문을 라자가하에서 마지막 순회 여행 중이시던 부처님에게 보냈습니다. 왓사까라는 부처님께 만일 아자따삿뚜가 릿차위를 공격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길 왓지의 단결은 힘과 조직에 근거하고 있고 그래서 그들이 단결의 규칙을 지키는 한 어떤 힘으로도 그들을 무찌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곁에 앉아 있던 아난다 마하 테라에게 물었습니다.


 “릿차위 사람들은 사란다다 쩨띠야에서 그들에게 전해준 7가지 행동 규칙(7불퇴법)을 지키는가?” 아난다 테라는 대답했습니다. “부처님! 릿차위 사람들은 여전히 7가지 행동 규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자 왓사까라는 부처님께 절을 하고 부처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왓사까라는 릿차위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킬 계획을 짰습니다. 그는 아자따삿뚜 왕에게 요청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어서 머리털을 다 잘린 채 왕국에서 추방당하는 벌을 받는다는 각본을 짜서 실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그의 충고를 따랐습니다. 

왓사까라는 릿차위로 가서 어떻게 하여 아자따삿뚜 왕이 왕국에서 자신을 쫓아냈나 하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왓사까라가 왕국으로부터의 추방 담을 늘어놓았을 때 모든 릿차위 사람들이 그를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자 그는 사법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왓사까라는 릿차위 사람들이 그를 신임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정치적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릿차위 사람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여 반목과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의 단결은 매우 철저히 붕괴되어 심지어 공화국이 위험에 처하고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누구 하나 전처럼 모이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매국노라고 하는 사람들이 싸우러 왔습니다. 웨살리에 머무는 3년 동안에 왓사까라는 공화국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비밀리에 공화국을 공격하라는 전갈을 아자따삿뚜 왕에게 보냈습니다. 


마할리 릿차위


마할리 릿차위의 이름은 빨리 주석서의 강가로하나에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는 웨살리의 한 릿차위 왕자였습니다. 그는 학업을 위해 딱까실라로 가는 도중에 꼬살라와 반둘라의 빠세나디 왕자, 꾸시나라의 말라 왕자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500명 이상의 릿차위 왕자들에게 궁술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는 릿차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궁술시범을 보이다가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궁술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눈 먼 스승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마을 하나와 10만 금화를 주었습니다. 사왓티와 웨살리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이 있는 웨살리 성문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바로 이 문 옆에 마할리 릿차위의 집이 있었고 그가 왕자들에게 궁술을 가르친 곳도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 그저 평범한 릿차위 사람이었습니다. 웨살리에 기근이 닥치자 릿차위에서는 국가적인 재난을 막기 위하여 어느 성자를 모셔올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연민심이 많으신 부처님을 모셔 와야 한다고 만장일치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빔비사라 왕을 잘 아는 사이였던 마할리 릿차위가 릿차위를 대표하여 부처님을 모셔올 사자로 보내졌습니다. 빔비사라 왕에게 바치는 많은 선물과 함께 다른 릿차위 사람들도 마할리와 동행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얻어 웨살리를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부처님에게 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빔비사라 왕을 만나기 위해 얏티와나에 계셨을 때 마할리 릿차위도 그곳에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수다원이 된 시기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담마빠다 주석서의 마할리 편에 의하면 마할리 릿차위는 부처님이 웨살리에 머무시는 동안, 삭까(제석천) 혹은 인다(인드라, 제석천)에 대하여 들으신 것이 있느냐고 부처님에게 한번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석천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제석천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필요한 덕을 보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압빠마데나 마가와…” 게송을 암송하셨습니다. 마할리 릿차위는 그때 수다원과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마할리 릿차위는 릿차위 사람들에게 대단한 은인이었습니다. 하루는 반둘라 세나빠띠가 임신한 아내를 사왓티에서 웨살리로 데리고 와서, 릿차위 사람들이 신비스런 목욕탕으로 사용하던 연못에서 목욕하게 함으로서 그녀의 원을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릿차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복수하기 위해 반둘라 세나빠띠를 뒤쫓아 갔습니다. 마할리 릿차위가 그때 충고하길 반둘라 세나빠띠를 뒤쫓으면 그에게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므로 뒤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빨리 비유경에 의하면 콜리야 공주 숩빠와사와 시왈리 테라가 각각 마할리 릿차위의 아내와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0

INFORMATION


상호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이사장: 이용재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반계1길 21-33 붓다의 길따라 선원

TEL: 010-4242-5140/ 010-3181-2316 

E-MAIL: stonhi27@hanmail.net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RMATION


상호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이사장: 이용재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반계1길 21-33 붓다의 길따라 선원




TEL:   010-4242-5140/ 010-3181-2316

E-MAIL: stonhi27@hanmail.net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

ALL RIGHTS RESERVED.




© BYULZZI Corp. All Rights Reserved. hosting by byulz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