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21 15:25
교단에 대한 봉사
부처님 시대 당시에 빠세나디 왕 만큼 교단에 헌신적이었던 왕은 없었습니다. 그는 제따와나에 비구 스님들을 위한 살랄라가라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제따와나 뒤에 비구니 교단을 위한 라자까라마 수도원(왕원정사)을 건립했습니다.
그가 꼬살라 국민으로서 제따와나에 머무르고 있는 앙굴리말라 테라 스님을 보았을 때 왕은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그를 궁으로 초대해서 가사 등을 선물했습니다.
한번은 라자가하의 한 존경받는 가문 출신의 여인이 비구니 교단에 입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녀는 도시에 사는 젊은 남자와 결혼하여 그 남자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세속의 삶을 버리고 데와닷따 스님에게 갔습니다. 그녀는 존경과 영예에 쌓여 계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녀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데와닷따 스님은 그녀의 인격을 의심하여 그녀를 파문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처님이 머무르고 계시는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비록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부처님께서는 위사카, 아나타삔디까, 쭐라 아나타삔디까 그리고 빠세나디 꼬살라 왕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그녀를 조사하게 했으며 우빨리 테라가 그 위원회를 돕도록 했습니다. 위원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조사하여 그녀가 교단에 입문하기 전에 임신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지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비구니 수도원에 아기가 있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깟사빠라는 이름의 그 사내아이를 데리고 궁으로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 후에 그 아이는 꾸마라 깟사빠(깟사빠 왕자)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왕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꾼다다나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그를 따라 다니는 한 여자가 사람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꾼다다나 스님은 그 여자를 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매우 곤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왕은 전말을 조사한 후 그 여자라는 것이 실은 영혼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따라서 왕은 그 스님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꾼다다나 스님에게 매일 공양을 제공했습니다.
한번은 왕이 자신의 한 벌뿐인 옷을 부처님에게 올리는 한 바라문을 보고는 그에게 많은 옷을 하사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까사띠까였습니다. 또 한 번은 짠다낭갈리까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을 들은 왕은 그를 기뻐하며 그에게 많은 옷을 하사했습니다.
말년에 왕은 부처님에게 극진한 헌신을 보여줬습니다. 심지어는 하인인 리시닷따와 뿌라나 타빠띠가 잠잘 때 왕을 향해서 다리를 뻗는 데도 왕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부처님이 계신 방향으로는 발을 뻗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에 부처님에게 가서 그의 하인들조차도 얼마나 부처님에게 헌신하는 지를 말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80대의 왕이 말년에 얼마나 부처님에게 헌신했나 하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부 경전 주석서는 우리에게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들의 정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왕실 사령관 반둘라와 32명의 아들들을 죽인 후에 정신적인 평화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석가족의 한 도시인 메다룸빠로 부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자 왕은 즉시 정신적 평화를 경험했으며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이때 왕은 부처님에게 많은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꼬살라 왕국의 시민일 뿐 아니라 80대이었으며 캇띠야(왕족)였습니다.
그가 간다꾸띠(향실, 부처님의 처소) 안에서 부처님과 대화에 몰두해 있는 동안 살해된 반둘라 세나빠띠의 의조카이며 왕의 사령관인 디가까라야나가 왕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말 한 마리와 하녀 하나만 남겨두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디가까라야나는 사왓티로 갔습니다. 그리고 왕관의 양도를 뜻하는 흰 우산을 위두다바 왕자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위를 수락하지 않으면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왕은 간다꾸띠를 나왔을 때 하인이나 호위병 중 그 누구도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녀는 만일 왕이 살고 싶으면 사왓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디가까라야나가 협박했다는 것을 왕에게 전했습니다. 왕은 혼란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왕국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라자가하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조카인 마가다의 아자따삿뚜 왕이 도와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빠세나디 왕의 최후의 순간
라자가하에 이르기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져 성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 밖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가장 값싼 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도랑물을 마셨습니다.
극도로 치욕을 당한 왕은 밤새 설사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녀의 무릎에 머리를 누인 채 밤을 지새웠습니다. 부처님의 예언대로 왕은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힘센 왕의 비극적 죽음을 참을 수 없었던 하녀는 통곡했습니다. 그 후에 아자따삿뚜 왕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영예에 합당한 장례식이 치려졌습니다.
태어난 자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전에 선행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간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아나가따왕사(미래사)에 따라 장래 벽지불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작성일 : 13-10-21 15:25
교단에 대한 봉사
부처님 시대 당시에 빠세나디 왕 만큼 교단에 헌신적이었던 왕은 없었습니다. 그는 제따와나에 비구 스님들을 위한 살랄라가라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제따와나 뒤에 비구니 교단을 위한 라자까라마 수도원(왕원정사)을 건립했습니다.
그가 꼬살라 국민으로서 제따와나에 머무르고 있는 앙굴리말라 테라 스님을 보았을 때 왕은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그를 궁으로 초대해서 가사 등을 선물했습니다.
한번은 라자가하의 한 존경받는 가문 출신의 여인이 비구니 교단에 입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그녀는 도시에 사는 젊은 남자와 결혼하여 그 남자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세속의 삶을 버리고 데와닷따 스님에게 갔습니다. 그녀는 존경과 영예에 쌓여 계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그녀가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데와닷따 스님은 그녀의 인격을 의심하여 그녀를 파문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처님이 머무르고 계시는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비록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부처님께서는 위사카, 아나타삔디까, 쭐라 아나타삔디까 그리고 빠세나디 꼬살라 왕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그녀를 조사하게 했으며 우빨리 테라가 그 위원회를 돕도록 했습니다. 위원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를 조사하여 그녀가 교단에 입문하기 전에 임신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지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비구니 수도원에 아기가 있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깟사빠라는 이름의 그 사내아이를 데리고 궁으로 가서 돌봐 주었습니다. 후에 그 아이는 꾸마라 깟사빠(깟사빠 왕자)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왕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꾼다다나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그를 따라 다니는 한 여자가 사람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꾼다다나 스님은 그 여자를 볼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매우 곤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왕은 전말을 조사한 후 그 여자라는 것이 실은 영혼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따라서 왕은 그 스님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꾼다다나 스님에게 매일 공양을 제공했습니다.
한번은 왕이 자신의 한 벌뿐인 옷을 부처님에게 올리는 한 바라문을 보고는 그에게 많은 옷을 하사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까사띠까였습니다. 또 한 번은 짠다낭갈리까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을 들은 왕은 그를 기뻐하며 그에게 많은 옷을 하사했습니다.
말년에 왕은 부처님에게 극진한 헌신을 보여줬습니다. 심지어는 하인인 리시닷따와 뿌라나 타빠띠가 잠잘 때 왕을 향해서 다리를 뻗는 데도 왕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부처님이 계신 방향으로는 발을 뻗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에 부처님에게 가서 그의 하인들조차도 얼마나 부처님에게 헌신하는 지를 말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80대의 왕이 말년에 얼마나 부처님에게 헌신했나 하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부 경전 주석서는 우리에게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들의 정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왕실 사령관 반둘라와 32명의 아들들을 죽인 후에 정신적인 평화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석가족의 한 도시인 메다룸빠로 부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자 왕은 즉시 정신적 평화를 경험했으며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이때 왕은 부처님에게 많은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꼬살라 왕국의 시민일 뿐 아니라 80대이었으며 캇띠야(왕족)였습니다.
그가 간다꾸띠(향실, 부처님의 처소) 안에서 부처님과 대화에 몰두해 있는 동안 살해된 반둘라 세나빠띠의 의조카이며 왕의 사령관인 디가까라야나가 왕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말 한 마리와 하녀 하나만 남겨두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디가까라야나는 사왓티로 갔습니다. 그리고 왕관의 양도를 뜻하는 흰 우산을 위두다바 왕자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위를 수락하지 않으면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왕은 간다꾸띠를 나왔을 때 하인이나 호위병 중 그 누구도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녀는 만일 왕이 살고 싶으면 사왓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디가까라야나가 협박했다는 것을 왕에게 전했습니다. 왕은 혼란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는 왕국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라자가하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조카인 마가다의 아자따삿뚜 왕이 도와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빠세나디 왕의 최후의 순간
라자가하에 이르기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워져 성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 밖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가장 값싼 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도랑물을 마셨습니다.
극도로 치욕을 당한 왕은 밤새 설사로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녀의 무릎에 머리를 누인 채 밤을 지새웠습니다. 부처님의 예언대로 왕은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힘센 왕의 비극적 죽음을 참을 수 없었던 하녀는 통곡했습니다. 그 후에 아자따삿뚜 왕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영예에 합당한 장례식이 치려졌습니다.
태어난 자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전에 선행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간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아나가따왕사(미래사)에 따라 장래 벽지불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