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21 15:23
부처님에 대한 빠세나디 왕의 시봉
일단 부처님에게 귀의한 후 빠세나디 왕은 죽을 때까지 부처님의 엄격한 제자로 남았습니다. 부처님 힘의 완전한 지혜를 알기 전에 그는 부처님에 대하여 조소적인 표현을 부처님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 중의 하나였던 말리까 왕비에게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빠세나디 왕의 그릇된 생각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후에 그는 부처님, 담마 혹은 상가에 대한 비난을 들으면 매우 가슴 아파 했습니다.
다른 종교의 수도자들이 공양을 받지 못하게 되자, 부처님이 오직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들에게만 공양을 제공하도록 사람들을 종용하여 결국 다른 교단 사람들은 탁발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하면서 부처님을 비난하는 말을 퍼트렸습니다. 그들은 나아가 부처님이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들에게 하는 보시만이 덕을 쌓는 일이고 그렇지 않은 스님들에게 하는 보시는 덕이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하면서 부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고따마가 탁발로 살아가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소문을 너무 부풀려서 빠세나디 왕 조차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믿지 않았습니다. 왕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어느 축제날에 제따와나 수도원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은 부처님에게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지 물어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말했습니다.
“부처님! 보시는 누구에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보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또한 다나(보시)의 중요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군중을 설득시켰습니다. 다른 종교의 수도자들에 의해 퍼진 그릇된 소문들은 자연스럽게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소위 다른 종교의 수도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보시를 얻지 못하여 입지가 좁아지자 살아남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를 꾀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을 모욕하고 깎아 내리는 음모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순다리 빠립왓지까라는 이름의 여신도에게 부처님과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방금 돌아오는 길이라고 수도원에 오는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시켰습니다. 얼마 후에 이 음모자들은 어떤 자들을 매수하여 순다리 빠립왓지까를 살해하여 제따와나 수도원의 건물 뒤에 매장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이교도는 순다리 빠립왓지까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왕에게도 신고를 했습니다. 매일 수도원의 설법에 참석하곤 했던 순다리 빠립왓지까가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왕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심나는 점이 있는 지 물었을 때 그들은 그녀가 제따와나 수도원 안에 있었던 점이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의 허가를 받아 죽은 사람의 머리를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작거리에 내놓고 부처님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처님이나 또는 교단 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볼 수 없었습니다. 스님들은 다만 다음과 같은 노래를 그들을 비난한 사람들에게 암송해 줄 뿐이었습니다.
“아부-따와-디- 니라양 우뻬-띠, 요- 와-삐 까뜨와- 나 까로-밋짜-하.
우보-삐 떼- 뻿짜 사마 바완띠, 니히-나깜마- 마누자- 빠랏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자기가 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 또한 지옥으로 가며,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같은 운명을 맞으리.”
결국 왕실의 사찰 요원이 순다리 빠립왓지까를 살해한 것은 바로 외도 빠립왓지까 자신들이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 결과 거짓 소문이 사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수도자라는 무리들도 사회적 수모를 당해야 했으며 왕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부처님이 심한 모욕과 비방 그리고 거짓 선동 공세에 처해 있으면서도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왕은 몹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부처님을 만나 왜 아무런 말씀이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사람은 사악하고 어떤 사람은 점잖아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 도덕과 선행과 덕에 대해 외쳐 댄다면 그 사람에게서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둣탓타까 경을 설법하셨습니다. 왕은 매우 흡족했습니다.
다시 한 번 외도들이 한 여신도로 하여금 부처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을 내도록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 역시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외도 빠립왓지까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는 잃어버린 소를 찾고 있던 한 남자가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부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여 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만 금화를 빚지고 있었고 고향에는 일곱 명의 딸과 아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후에 부처님은 새로 계를 받은 그 스님을 데리고 궁으로 갔습니다. 부처님은 왕이 보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문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일지라도 부처님은 왕이 그것을 부처님의 문제로 보아주길 요청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그 스님으로부터 이야기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왕은 모든 스님의 빚을 갚아주고 그의 7명의 딸과 아내를 궁에서 살게 해 주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때로는 제따와나 수도원을 하루에 세 번 방문했습니다. 그는 부처님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과중한 국사와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오후에 점심을 먹고 있다가 그는 갑자기 수도원에 가지 않은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점심을 마치자마자 그는 수도원으로 내달렸습니다. 건장한 체격인 왕은 언제나 포식(도나빠까)을 했습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좀 불편한 모습으로 부처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왕을 살펴보고 편히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왕에게 건강을 지키고 싶으면 과식하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왕에게 과식의 헛됨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노래를 하나 암송하셨습니다. 그 후에 왕은 식사를 할 때마다 조카 수닷사나에게 그 노래를 암송시켰습니다. 마침내 왕은 전에 먹었던 음식의 1/4로 만족하게끔 되었습니다. 왕은 정신적인 길잡이 뿐 만 아니라 일상적인 가르침을 주는 부처님에 대해 매우 기뻤습니다.
부처님의 정신적 가르침에 많은 감동을 받은 왕이 하루는 깊은 감사의 뜻으로 부처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도 왕은 역시 감사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이것이 왕이 부처님과 함께한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부처님도 빠세나디 꼬살라 왕과 말리까 왕비가 부처님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만큼 그들에 대해 많은 애정과 동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과 말리까 왕비가 침실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왕은 너무 격해져서 말리까 왕비가 방 안에 있건 말건 그녀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말리까는 아마 부처님은 자신들의 싸움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부처님께서 궁을 방문하여 그들 사이의 견해차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왕은 와사바캇띠야가 노예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모든 권한과 직위를 빼앗아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다시 궁으로 와서 그들 사이의 불화를 잠재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은 궁으로 두 번이나 오셔서 그들 가족문제를 해결하시고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왕실의 세습자산으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석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왕은 현재 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사해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이 헛수고였습니다. 후에 그것은 아난다 테라 스님의 제안에 따라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임해 부처님은 반다나 경(속박 경)을 설법하셨습니다.
작성일 : 13-10-21 15:23
부처님에 대한 빠세나디 왕의 시봉
일단 부처님에게 귀의한 후 빠세나디 왕은 죽을 때까지 부처님의 엄격한 제자로 남았습니다. 부처님 힘의 완전한 지혜를 알기 전에 그는 부처님에 대하여 조소적인 표현을 부처님의 가장 헌신적인 제자 중의 하나였던 말리까 왕비에게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빠세나디 왕의 그릇된 생각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후에 그는 부처님, 담마 혹은 상가에 대한 비난을 들으면 매우 가슴 아파 했습니다.
다른 종교의 수도자들이 공양을 받지 못하게 되자, 부처님이 오직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들에게만 공양을 제공하도록 사람들을 종용하여 결국 다른 교단 사람들은 탁발할 권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하면서 부처님을 비난하는 말을 퍼트렸습니다. 그들은 나아가 부처님이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들에게 하는 보시만이 덕을 쌓는 일이고 그렇지 않은 스님들에게 하는 보시는 덕이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하면서 부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고따마가 탁발로 살아가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소문을 너무 부풀려서 빠세나디 왕 조차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믿지 않았습니다. 왕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어느 축제날에 제따와나 수도원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은 부처님에게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 보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지 물어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말했습니다.
“부처님! 보시는 누구에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헌신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보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또한 다나(보시)의 중요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설명은 군중을 설득시켰습니다. 다른 종교의 수도자들에 의해 퍼진 그릇된 소문들은 자연스럽게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소위 다른 종교의 수도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보시를 얻지 못하여 입지가 좁아지자 살아남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를 꾀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을 모욕하고 깎아 내리는 음모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순다리 빠립왓지까라는 이름의 여신도에게 부처님과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방금 돌아오는 길이라고 수도원에 오는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시켰습니다. 얼마 후에 이 음모자들은 어떤 자들을 매수하여 순다리 빠립왓지까를 살해하여 제따와나 수도원의 건물 뒤에 매장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이교도는 순다리 빠립왓지까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왕에게도 신고를 했습니다. 매일 수도원의 설법에 참석하곤 했던 순다리 빠립왓지까가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왕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심나는 점이 있는 지 물었을 때 그들은 그녀가 제따와나 수도원 안에 있었던 점이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의 허가를 받아 죽은 사람의 머리를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작거리에 내놓고 부처님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처님이나 또는 교단 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도 볼 수 없었습니다. 스님들은 다만 다음과 같은 노래를 그들을 비난한 사람들에게 암송해 줄 뿐이었습니다.
“아부-따와-디- 니라양 우뻬-띠, 요- 와-삐 까뜨와- 나 까로-밋짜-하.
우보-삐 떼- 뻿짜 사마 바완띠, 니히-나깜마- 마누자- 빠랏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자기가 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 또한 지옥으로 가며,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같은 운명을 맞으리.”
결국 왕실의 사찰 요원이 순다리 빠립왓지까를 살해한 것은 바로 외도 빠립왓지까 자신들이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 결과 거짓 소문이 사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수도자라는 무리들도 사회적 수모를 당해야 했으며 왕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부처님이 심한 모욕과 비방 그리고 거짓 선동 공세에 처해 있으면서도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왕은 몹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에 부처님을 만나 왜 아무런 말씀이 없었는지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떤 사람은 사악하고 어떤 사람은 점잖아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군가 도덕과 선행과 덕에 대해 외쳐 댄다면 그 사람에게서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둣탓타까 경을 설법하셨습니다. 왕은 매우 흡족했습니다.
다시 한 번 외도들이 한 여신도로 하여금 부처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을 내도록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 소문 역시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외도 빠립왓지까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루는 잃어버린 소를 찾고 있던 한 남자가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부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리고 출가하여 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만 금화를 빚지고 있었고 고향에는 일곱 명의 딸과 아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후에 부처님은 새로 계를 받은 그 스님을 데리고 궁으로 갔습니다. 부처님은 왕이 보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문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일지라도 부처님은 왕이 그것을 부처님의 문제로 보아주길 요청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그 스님으로부터 이야기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왕은 모든 스님의 빚을 갚아주고 그의 7명의 딸과 아내를 궁에서 살게 해 주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때로는 제따와나 수도원을 하루에 세 번 방문했습니다. 그는 부처님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과중한 국사와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오후에 점심을 먹고 있다가 그는 갑자기 수도원에 가지 않은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점심을 마치자마자 그는 수도원으로 내달렸습니다. 건장한 체격인 왕은 언제나 포식(도나빠까)을 했습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좀 불편한 모습으로 부처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왕을 살펴보고 편히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왕에게 건강을 지키고 싶으면 과식하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왕에게 과식의 헛됨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노래를 하나 암송하셨습니다. 그 후에 왕은 식사를 할 때마다 조카 수닷사나에게 그 노래를 암송시켰습니다. 마침내 왕은 전에 먹었던 음식의 1/4로 만족하게끔 되었습니다. 왕은 정신적인 길잡이 뿐 만 아니라 일상적인 가르침을 주는 부처님에 대해 매우 기뻤습니다.
부처님의 정신적 가르침에 많은 감동을 받은 왕이 하루는 깊은 감사의 뜻으로 부처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도 왕은 역시 감사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이것이 왕이 부처님과 함께한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부처님도 빠세나디 꼬살라 왕과 말리까 왕비가 부처님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만큼 그들에 대해 많은 애정과 동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과 말리까 왕비가 침실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왕은 너무 격해져서 말리까 왕비가 방 안에 있건 말건 그녀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말리까는 아마 부처님은 자신들의 싸움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부처님께서 궁을 방문하여 그들 사이의 견해차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왕은 와사바캇띠야가 노예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모든 권한과 직위를 빼앗아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다시 궁으로 와서 그들 사이의 불화를 잠재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은 궁으로 두 번이나 오셔서 그들 가족문제를 해결하시고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왕실의 세습자산으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석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왕은 현재 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사해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방법이 헛수고였습니다. 후에 그것은 아난다 테라 스님의 제안에 따라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임해 부처님은 반다나 경(속박 경)을 설법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