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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saloApr 11, 2021, 11:30 AM
[계율(戒律)은 열반의 주춧돌]
2. <계율>을 왜 열반의 초석이라 하는가?
“계율의 바탕 없이
삼매가 증장될 수 없느니라.
나아가 삼매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지혜도 성숙할 수 없느니라. 계율과 삼매와
지혜가 균형을 이루면서 결집됐을 때라야만이
마침내 번뇌를 모두 끊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느니라.”
“청정한 계율을 기반으로 했을 때
바른 삼매를 이룰 수 있고,
바른 삼매가 통찰지를 일으키나니,
청정한 계율, 바른 삼매, 그리고
통찰의 지혜로 이루어진 마음은
욕계와 색계 무색계에 대한 사견, 무명 등
흐르는 성품의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느니라.”
<율장 대품·Mahāvagga>
<계율>은 열반의 초석입니다. <계행>으로써 감각적 욕망을 다스릴 수 있고, <계행>으로써 악의와 분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계율>의 실천이야말로 수행자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여 삼매를 이루고 통찰지 성숙을 도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불교수행의 핵심요소입니다. <계율>은 수행자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들이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실천덕목입니다. 빨리어 소부경전(굿따까 니까야) <숫따니빠따>의 ‘설산에 사는 자 편’을 보면, 고따마 부처님과 설산야차의 문답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번뇌의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고통의 큰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깊은 바다에서
어떤 사람이 가라앉지 않습니까?”
“항상 청정한 계율을 몸에 지니면서
지혜가 있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안으로 살피는 굳은 결심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건너기 어려운 저 번뇌의
거센 흐름을 능히 건널 수 있느니라.
그런 사람만이 관능의 욕망을 떠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감각적 쾌락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능히 고통의 깊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을 수 있느니라.”
이처럼 청정한 <계행>이 밑받침 되지 않고서는 <바른 삼매>를 이룰 수 없고, <바른 지혜>를 통한 번뇌의 완전한 소멸, 구경의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계율>의 실천수행 속에서 삼매를 닦고, 삼매를 토대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諸)를 증득했을 때라야 만이 마침내 구경의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정형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라자가하 독수리봉 산에 머무시면서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계(계율)이니라,
이러한 것이 정(삼매)이니라,
이러한 것이 혜(통찰지)이니라,
계율을 철저히 닦아서 생긴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느니라.
삼매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통찰지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느니라.
통찰지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마음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와
존재에 기인한 번뇌와 무명에 기인한
온갖 번뇌들로부터 해탈하게 되느니라.”
<DN16 : 완전한 열반 경,
Mahāparinibbāna-sutta>
열반의 성취는 이와 같이 <계율>의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율>을 본질적인 수행과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선정>만을 수행의 본질로 생각하여 자나 깨나 오직 선정만을 추구한다거나, 또는 <지혜수행>을 통해서만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오직 내적 관찰만을 강조하다보니 자연히 <계행>이 찬밥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사문 경>(Samaņa-sutta)에는 출가 사문(비구)이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일 3가지가 적시되어 있습니다. 즉, 보다 높은 계(계율)를 공부(학습)하고, 보다 높은 마음을 공부(수련)하고, 보다 높은 통찰지를 공부(계발)하는 것. 이 3가지 공부는 다름 아닌 <팔정도> 즉 <계·정·혜> 3학을 수준 높여 잘 닦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가 사문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이 3가지는 과연 어떠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일까? <사문 경>(Samaņa-sutta)과 <왓지의 후예 경>(Vajjiputta-sutta)과 <유학 경>(Sekkha-sutta)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3가지) 공부는
다음과 같이 닦아 나가야 하느니라.
우리는 높은 계(戒律)를 실천함에
‘강한 열의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높은 마음을 수련함에
강한 열의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높은 통찰지를 계발함에
강한 열의를 지닐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렇게 닦아 나가야 하느니라.”
“그러나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는
‘나는 비구다. 나는 비구다.‘라고 하면서
비구 상가를 따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높은 계를 실천함에 있어 다른 비구들처럼
강한 열의가 없느니라. 또한 그에게는
높은 마음을 수련함에 있어 다른 비구들처럼
강한 열의가 없느니라. 또한 그에게는
높은 통찰지를 계발함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강한 열의가 없느니라. 그는 단지
‘나는 비구다. 나는 비구다.’라고 하면서
비구 상가의 뒤를 따를 뿐이니라.”
“높은 계를 실천할 때 비로소
높은 마음을 수련할 때 비로소
높은 통찰지를 계발할 때 비로소
탐욕이 제거되고, 성냄이 제거되고,
어리석음이 제거될 것이니라. 이와 같이
탐진치가 제거되기 때문에 그대들은 절대로
해로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악한 것을 받들어 행하지 않게 되느니라.”
“바른 길을 따라 계정혜 3학을
닦아 나가는 유학인(有學人)에게
오염원들이 소멸되어 먼저
도(道)의 지혜가 생기고 곧이어
구경의 지혜가 생기느니라.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자에게
‘존재에 대한 족쇄가 소멸되어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라는
회광반조의 지혜가 생겨나느니라.”
한때 ‘깨달음 지상주의’란 말이 유행했던 적 있습니다. 목표지향적인 한국의 오랜 수행전통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깨달음’은 <지혜>의 영역인 동시에 그 말 속에는 ‘열반지향 의식’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과녁을 향한 응시가 정확해야 목표지점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궁극의 지향점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발로 뛰고(계행) 가슴으로 다가가기도(정행) 전에 궁극을 향한 ‘관념의 화살’이 뇌리 속에 들어와 박혀 수행의 행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결함경>(Vipatti-sutta)과 <깨끗함 경>(Soceyya-sutta)은 ‘3가지 구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족이란 두루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이지 않고, 편향적이지 않고 부족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3가지 구족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계행의 구족, 마음의 구족, 견해의 구족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계행의 구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 죽이는 것을 삼가하고,
주지 않는 물건 절대로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절대로 하지 삼가하고,
거짓말을 삼가하고, 이간말을 삼가하고,
험한말을 삼가하고, 쓸데없는 말을 삼가하나니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계행의 구족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마음의 구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악의 없는 마음을 가지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의 구족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견해의 구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보시한 것도 있고 제사지낸 것도 있고,
헌공한 것도 있다. 선업과 불선업들에 대한
결실도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화생(化生)하는 중생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라는
바른 견해를 가졌고,
전도되지 않은 견해를 가졌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의 구족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신행(身行)이 깨끗하고, 언행(言行)이 깨끗하고
마음이 깨끗하여 일체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고결함과 청결함을 구족한 자를 일컬어
악(惡)을 씻어낸 자라 부르느니라.”
한국 불교전통에 ‘선사(禪師)가 되기 전에 먼저 율사(律師)가 되어라!’ 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출가자라면 누구나 단박에 깨달음을 얻어 생사해탈을 이루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며, 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 생기고 나면 그 알음알이를 밑천으로 하여 선사 흉내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선사흉내를 잘 낸다 하더라도 곧 근본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설령 법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할지라도 필경에는 그 <계행>의 공덕으로 <정·혜>가 구족되어 생사해탈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다마 붓다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무실 때 , 하루는 소를 사고파는 무화과나무 근처에서 탁발을 하시다가 문득 어떤 비구가 분명한 알아차림 없이 산란한 마음으로 감각기능을 제어하지 않은 채 행동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 비구에게 ‘비구여, 그대는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자신을 더럽혀 비린내를 풍기면 그대에게 파리들이 몰려들어 공격할 것이니라.’하고 타일러 주시고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 주셨습니다.
“눈과 귀를 보호하지 않고,
감각기능을 제어하지 않는 자에게
욕망에 의지한 나쁜 생각의 파리떼가 몰려드나니
더러움을 만들어 비린내를 풍기는 비구는
열반으로부터 멀리 있고, 오직 괴로움을 겪으리.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그는 마을에서건 숲에서건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파리들만 앞세우고 다니네. 그러나 계를 구족하고
통찰지와 함께 고요함을 즐기는 수행자는
들끓는 파리를 모두 날려버리고 오직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서 (열반으로) 나아간다네.”
AN3:126 <더러움 경>,(Kaṭuviya-sutta)
‘기초를 튼튼히 하라!’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그 어떤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으며, 기초가 튼튼한 건물은 고강도의 지진을 버텨냅니다. 경주 황룡사지에 가보신 적 있습니까? 너른 평원 한가운데 놓여있는 그 육중한 돌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 세월의 무상함을 견뎌내면서 당당하게 1천년동안 황룡사 9층탑을 떠받들고 있었을 주춧돌들. 누구라도 직접 가서 보면 기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출발은 목적지를 향해 있고, 모든 끝은 반드시 시작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아무리 급하다 한들 바늘허리에 실을 꿰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물가에 앉아 숭늉을 찾아서는 안 되겠지요. 첫 술에 배부를 리 없고, 천 리 길도 한 걸음 부터라 했습니다. 비록 타고난 순발력과 영민한 지능을 가진 토끼였지만, 끈기와 인내라는 기초로 무장된 느린 거북이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청정한 <계행>은 나와 남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정신적 대기질을 정화시켜 줍니다. <지계>의 실천은 모든 수행의 기초입니다. 궁극의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주춧돌’입니다.
불멸 2565(2021). 4.11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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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래 사진 3장은 2007년 당시 제막식(점안식) 행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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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2019년, 안개 낀 봄날의 태종사 전경.
대웅전 앞에 시마석(결계석)이 세워져 있고 노보살님 한분이 발우탑 앞에서 합장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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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saloApr 11, 2021, 11:3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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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戒律)은 열반의 주춧돌]
2. <계율>을 왜 열반의 초석이라 하는가?
“계율의 바탕 없이
삼매가 증장될 수 없느니라.
나아가 삼매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지혜도 성숙할 수 없느니라. 계율과 삼매와
지혜가 균형을 이루면서 결집됐을 때라야만이
마침내 번뇌를 모두 끊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느니라.”
“청정한 계율을 기반으로 했을 때
바른 삼매를 이룰 수 있고,
바른 삼매가 통찰지를 일으키나니,
청정한 계율, 바른 삼매, 그리고
통찰의 지혜로 이루어진 마음은
욕계와 색계 무색계에 대한 사견, 무명 등
흐르는 성품의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하느니라.”
<율장 대품·Mahāvagga>
<계율>은 열반의 초석입니다. <계행>으로써 감각적 욕망을 다스릴 수 있고, <계행>으로써 악의와 분노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계율>의 실천이야말로 수행자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여 삼매를 이루고 통찰지 성숙을 도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불교수행의 핵심요소입니다. <계율>은 수행자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들이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실천덕목입니다. 빨리어 소부경전(굿따까 니까야) <숫따니빠따>의 ‘설산에 사는 자 편’을 보면, 고따마 부처님과 설산야차의 문답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번뇌의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고통의 큰 바다를 건널 수 있겠습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깊은 바다에서
어떤 사람이 가라앉지 않습니까?”
“항상 청정한 계율을 몸에 지니면서
지혜가 있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안으로 살피는 굳은 결심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건너기 어려운 저 번뇌의
거센 흐름을 능히 건널 수 있느니라.
그런 사람만이 관능의 욕망을 떠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감각적 쾌락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능히 고통의 깊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을 수 있느니라.”
이처럼 청정한 <계행>이 밑받침 되지 않고서는 <바른 삼매>를 이룰 수 없고, <바른 지혜>를 통한 번뇌의 완전한 소멸, 구경의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계율>의 실천수행 속에서 삼매를 닦고, 삼매를 토대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4가지의 성스러운 진리(四聖諸)를 증득했을 때라야 만이 마침내 구경의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정형입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는 라자가하 독수리봉 산에 머무시면서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계(계율)이니라,
이러한 것이 정(삼매)이니라,
이러한 것이 혜(통찰지)이니라,
계율을 철저히 닦아서 생긴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느니라.
삼매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통찰지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느니라.
통찰지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마음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와
존재에 기인한 번뇌와 무명에 기인한
온갖 번뇌들로부터 해탈하게 되느니라.”
<DN16 : 완전한 열반 경,
Mahāparinibbāna-sutta>
열반의 성취는 이와 같이 <계율>의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율>을 본질적인 수행과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선정>만을 수행의 본질로 생각하여 자나 깨나 오직 선정만을 추구한다거나, 또는 <지혜수행>을 통해서만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오직 내적 관찰만을 강조하다보니 자연히 <계행>이 찬밥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사문 경>(Samaņa-sutta)에는 출가 사문(비구)이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일 3가지가 적시되어 있습니다. 즉, 보다 높은 계(계율)를 공부(학습)하고, 보다 높은 마음을 공부(수련)하고, 보다 높은 통찰지를 공부(계발)하는 것. 이 3가지 공부는 다름 아닌 <팔정도> 즉 <계·정·혜> 3학을 수준 높여 잘 닦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가 사문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이 3가지는 과연 어떠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일까? <사문 경>(Samaņa-sutta)과 <왓지의 후예 경>(Vajjiputta-sutta)과 <유학 경>(Sekkha-sutta)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3가지) 공부는
다음과 같이 닦아 나가야 하느니라.
우리는 높은 계(戒律)를 실천함에
‘강한 열의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높은 마음을 수련함에
강한 열의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높은 통찰지를 계발함에
강한 열의를 지닐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렇게 닦아 나가야 하느니라.”
“그러나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는
‘나는 비구다. 나는 비구다.‘라고 하면서
비구 상가를 따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높은 계를 실천함에 있어 다른 비구들처럼
강한 열의가 없느니라. 또한 그에게는
높은 마음을 수련함에 있어 다른 비구들처럼
강한 열의가 없느니라. 또한 그에게는
높은 통찰지를 계발함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강한 열의가 없느니라. 그는 단지
‘나는 비구다. 나는 비구다.’라고 하면서
비구 상가의 뒤를 따를 뿐이니라.”
“높은 계를 실천할 때 비로소
높은 마음을 수련할 때 비로소
높은 통찰지를 계발할 때 비로소
탐욕이 제거되고, 성냄이 제거되고,
어리석음이 제거될 것이니라. 이와 같이
탐진치가 제거되기 때문에 그대들은 절대로
해로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악한 것을 받들어 행하지 않게 되느니라.”
“바른 길을 따라 계정혜 3학을
닦아 나가는 유학인(有學人)에게
오염원들이 소멸되어 먼저
도(道)의 지혜가 생기고 곧이어
구경의 지혜가 생기느니라.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자에게
‘존재에 대한 족쇄가 소멸되어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라는
회광반조의 지혜가 생겨나느니라.”
한때 ‘깨달음 지상주의’란 말이 유행했던 적 있습니다. 목표지향적인 한국의 오랜 수행전통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깨달음’은 <지혜>의 영역인 동시에 그 말 속에는 ‘열반지향 의식’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과녁을 향한 응시가 정확해야 목표지점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궁극의 지향점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발로 뛰고(계행) 가슴으로 다가가기도(정행) 전에 궁극을 향한 ‘관념의 화살’이 뇌리 속에 들어와 박혀 수행의 행보를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결함경>(Vipatti-sutta)과 <깨끗함 경>(Soceyya-sutta)은 ‘3가지 구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족이란 두루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이지 않고, 편향적이지 않고 부족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3가지 구족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계행의 구족, 마음의 구족, 견해의 구족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계행의 구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생명 죽이는 것을 삼가하고,
주지 않는 물건 절대로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절대로 하지 삼가하고,
거짓말을 삼가하고, 이간말을 삼가하고,
험한말을 삼가하고, 쓸데없는 말을 삼가하나니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계행의 구족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마음의 구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악의 없는 마음을 가지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의 구족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견해의 구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보시한 것도 있고 제사지낸 것도 있고,
헌공한 것도 있다. 선업과 불선업들에 대한
결실도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고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화생(化生)하는 중생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라는
바른 견해를 가졌고,
전도되지 않은 견해를 가졌느니라.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의 구족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신행(身行)이 깨끗하고, 언행(言行)이 깨끗하고
마음이 깨끗하여 일체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고결함과 청결함을 구족한 자를 일컬어
악(惡)을 씻어낸 자라 부르느니라.”
한국 불교전통에 ‘선사(禪師)가 되기 전에 먼저 율사(律師)가 되어라!’ 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출가자라면 누구나 단박에 깨달음을 얻어 생사해탈을 이루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며, 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 생기고 나면 그 알음알이를 밑천으로 하여 선사 흉내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선사흉내를 잘 낸다 하더라도 곧 근본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설령 법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할지라도 필경에는 그 <계행>의 공덕으로 <정·혜>가 구족되어 생사해탈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다마 붓다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무실 때 , 하루는 소를 사고파는 무화과나무 근처에서 탁발을 하시다가 문득 어떤 비구가 분명한 알아차림 없이 산란한 마음으로 감각기능을 제어하지 않은 채 행동하는 것을 보시고는 그 비구에게 ‘비구여, 그대는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자신을 더럽혀 비린내를 풍기면 그대에게 파리들이 몰려들어 공격할 것이니라.’하고 타일러 주시고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들려 주셨습니다.
“눈과 귀를 보호하지 않고,
감각기능을 제어하지 않는 자에게
욕망에 의지한 나쁜 생각의 파리떼가 몰려드나니
더러움을 만들어 비린내를 풍기는 비구는
열반으로부터 멀리 있고, 오직 괴로움을 겪으리.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그는 마을에서건 숲에서건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파리들만 앞세우고 다니네. 그러나 계를 구족하고
통찰지와 함께 고요함을 즐기는 수행자는
들끓는 파리를 모두 날려버리고 오직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서 (열반으로) 나아간다네.”
AN3:126 <더러움 경>,(Kaṭuviya-sutta)
‘기초를 튼튼히 하라!’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는 법이 없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그 어떤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으며, 기초가 튼튼한 건물은 고강도의 지진을 버텨냅니다. 경주 황룡사지에 가보신 적 있습니까? 너른 평원 한가운데 놓여있는 그 육중한 돌들을 보신 적 있습니까? 세월의 무상함을 견뎌내면서 당당하게 1천년동안 황룡사 9층탑을 떠받들고 있었을 주춧돌들. 누구라도 직접 가서 보면 기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출발은 목적지를 향해 있고, 모든 끝은 반드시 시작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아무리 급하다 한들 바늘허리에 실을 꿰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물가에 앉아 숭늉을 찾아서는 안 되겠지요. 첫 술에 배부를 리 없고, 천 리 길도 한 걸음 부터라 했습니다. 비록 타고난 순발력과 영민한 지능을 가진 토끼였지만, 끈기와 인내라는 기초로 무장된 느린 거북이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청정한 <계행>은 나와 남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정신적 대기질을 정화시켜 줍니다. <지계>의 실천은 모든 수행의 기초입니다. 궁극의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주춧돌’입니다.
불멸 2565(2021). 4.11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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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래 사진 3장은 2007년 당시 제막식(점안식) 행사 장면.
4.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2019년, 안개 낀 봄날의 태종사 전경.
대웅전 앞에 시마석(결계석)이 세워져 있고 노보살님 한분이 발우탑 앞에서 합장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