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붓다와 그의 가르침/빅쿠 보디

관리자
2021-04-22
조회수 1197

작성일 : 11-04-25 15:22



이 번역물은 "The Buddha and His Dhamma", by Bhikkhu Bodhi. 

http://www.accesstoinsight.org/lib/authors/bodhi/wheel433.html 자료를 의미 중심 번역 및 첨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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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국테라와다불교 홈페이지( http://www.theravada.co.kr )에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 깜맛사까(Kammassaka) - 


The Buddha and His Dhamma  by Bhikkhu Bodhi 


붓다와 그의 가르침 - 저자 : 빅쿠 보디, 번역 : 깜맛사까, 2011.04.17 


 

불교는 붓다(깨달은 성자)로 알려진 인도의 왕자에게서 유래 되는데 그는 기원전 5세기에 인도 북동부에서 가르침을 폈다. 200년 후 아소카왕의 후원으로 불교는 인도의 대부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거기에서 아시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소카왕에 의해 9 지역에 파견된 담마 사절단( 1 지역에 5명씩)의 노력으로 불교는 인도와 주변 파견국들에서 융성해지며 대중에게 삶을 꾸릴 수 있는 믿음과 지혜의 튼튼한 토대, 그리고 삶의 희망을 품게 하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여 그들 속에 뿌리를 내렸다. 불교는 아프가니스탄, 일본, 시베리아, 캄보디아, 한국 그리고 스리랑카처럼 지리적, 민족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나라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다른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렇지만, 이 모든 나라의 불교는 인도의 깨달은 성자인 붓다를 그들의 근본 스승으로서 삼아왔다. 


역사의 과정에서 불교는 12세기경 인도에서 사라졌지만, 불교가 사라지기 전에 인도의 힌두교를 깊은 차원에서 변화시켰고 근대에 와서는 타고르, 간디, 그리고 네루와 같은 다른 여러 인도 사상가들이 붓다를 모델로 삼았다. 20세기에 동양에서는 불교 신자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반면 서양에서 점점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불교 특유의 조용한 전통 방식으로 튼튼하게 뿌리를 뻗어 내리고 있다. 


긴 역사의 과정에서 불교는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평화롭고 비독단적인 특성 때문에 불교는 항상 기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문화와 종교 관습에 쉽게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에게 전파되어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원천이 되었다. 불교는 각 나라의 토착 신앙과 쉽게 융화되면서, 다른 형태로 발전한 불교들을 같은 종교의 테두리로 묶어주는 공통된 가닥을 찾는 것이 어렵게 되기도 했다. 그 결과 외부 표면상의 불교의 모습은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온화하며 전통을 중시하는 테라와다(상좌)불교로부터 극동아시아의 명상적이면서도 헌신적인 마하야나(대승)불교, 티베트의 신비로운 의식주의 바즈라야나(금강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너무 다르다. 이렇게 불교 종파들의 외형은 극명하게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붓다라고 알려진 한 성인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공통된 원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놀랍게도 붓다는 시간상으로는 우리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불교역사의 흐름에서 탁월한 후대 스승들보다 훨씬 더 멀리 있음에도 우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서,  이미지 그리고 개념으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그분의 목소리이다. 만약 힌두교 우파니샤드의 경전과 서성제(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둘은 시간상으로 백 년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전자는 우리가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먼 문화적 정신적 환경에서 나온 것 같고, 붓다의 가르침은 지난주에 뭄바이나 뉴욕에서 설해진 것처럼 들린다. 이처럼 우리에게 아주 밀접하게 다가오신 부처님의 태도와 시각은 그분이 우리 시대로부터 2500년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 역사의 변화 속에서도 일관성을 가진다. 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란 의미가 있는 ‘붓다’라는 존칭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이 시간의 급격한 흐름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무지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지만, 붓다는 그 깊은 무지의 잠에서 깨어났기에 주어진 이름으로, 그는 인간의 모든 조건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알았고, 또한 그 자신의 깨달음을 모두에게 나누어 다른 이들도 모두 깨닫게 하고자 진리의 가르침들을 선포했다. 2500년 동안 변하기 쉬운 역사의 각본에도,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변하는 견해와 사상에도 인간 삶의 근본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진실은 여전히 존재하기에 그러한 진실을 반조하고 이해할 만큼 성숙하였으며 지혜 있는 사람들은 그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제트기로 여행하며 컴퓨터 기술과 유전공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은 처음 인도 북동쪽의 한 마을(바라나시)에서 오래전에 선포되었던 그때처럼 여전히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고 이해할 만하며 강한 힘으로 온전하게 적용된다. 


  

1. 붓다의 삶 


비록 우리가 붓다의 삶을 정확한 날짜로 확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학자는 대략 563~483 BC에 붓다께서 생존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연대기적으로 약 80년 늦은 날짜를 말하기도 한다. 인간 문명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준 그러한 정신적인 지도자에 대해, 가장 높은 정신과 영혼의 뛰어남을 대하며 생기는 신화와 전설로 수놓아진 그의 삶에 대한 묘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붓다의 삶에 대해 빠알리 경장에서 우리는 그의 행적에 대해 상당히 실제적인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빠알리 경장을 통해 보이는 모습 중에 놀라운 것은 붓다 자신이 가르침의 핵심을 전달하고 구현하는 교훈의 연속으로서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삶은 사람과 가르침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융합된다. 


붓다는 현재 네팔의 영토로 히말라야산맥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인 사꺄 족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이고 성은 ‘고따마’이다. 전설에서는 거대 왕국의 왕자로 표현하지만, 실제 사꺄 족은 작은 부족이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는 부족 연합의 대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붓다 당시에 사꺄 족은 강한 부족국가인 꼬쌀라 국에 공물을 바쳤다. 초기 경전에 왕자의 탄생은 여러 신기한 현상들과 함께 일어난 것으로 묘사된다. 왕자의 탄생 후 곧 ‘아시따’라는 현인이 방문하여 왕자의 몸에서 미래 위대한 성인의 표징을 발견하고는 아기에게 경배하여 절을 하게 된다. 


고귀한 왕자로서 싯닷타는 호사롭게 양육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계절마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3개의 궁전을 지어줬다. 16살의 나이에 그의 사촌인 ‘야소다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사꺄 족의 수도인 까삘라왓투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무예와 정치를 배웠다. 


세월이 흘러 20세 후반이 되었을 때 싯닷타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그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주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평범하게 대하는 질문인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것이었다. 존재의 목적은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인가, 부와 권력의 성취인가? 또는 그것들보다 더 실질적이고 뛰어난 어떤 것이 있는가? 이것들이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질문들이었음에 틀림 없는데 그것은 맛지마니까야 26, 아리야빠리예사나(성스러운 참구)경에 기록된 묘사로 알 수 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깨닫기 전에 나의 삶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에 묶여 있었다. 내가 추구한 것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구속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숙고했다. ‘왜 삶이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대상이어야만 하는가? 나 스스로 태어남에 묶여 있지만 태어남의 재난을 이해하여 태어나지 않음을 추구하며 속박으로부터 최상의 안온인 닙바나를 추구한다. 나 스스로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에 묶여 있지만, 더 이상의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번뇌의 재난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며 속박으로부터 최상의 안온인 닙바나를 추구한다." 

삶의 절정인 29세에, 부모의 눈물을 뒤로하고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내고 노란 탁발승의 가사를 입고 집이 없는 출가자의 길로 들어섰다. 후대의 붓다 전기는 출가하는 바로 그날 아들인 라훌라가 태어났다고 덧붙여 말한다. 


집과 가족을 떠나면서 보살(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은 영적 스승의 지도로 정신적 열망을 추구하는 수행집단들이 모여 있는 지금의 비하르 지방인 마가다 국의 남쪽으로 향했다. 그 당시 북인도는 철학적 체계와 명상에서의 성취를 이뤘다고 자랑하는 많은 유명한 스승들이 있었다. 보살은 가장 뛰어난 2명의 스승인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찾아가서 명상의 체계를 배웠다. 보살은 그들의 가르침과 명상체계를 모두 성취하여 숭고한 집중상태에 도달했으나, 그들의 가르침은 보살이 추구하는 완전한 깨달음이며 모든 존재의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인 닙바나로 이끌지 않았기에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스승들을 떠나면서 보살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고대 인도 당시부터 널리 알려졌고 현재도 여전히 추종자가 있는 고행주의로, 해방은 일반적인 수준의 인내를 넘어선 몸의 극심한 고통으로 얻어진다는 신념을 쫓는 금욕적인 고행주의자의 길이었다. 6년 동안 보살은 단호한 결심으로 이 방법을 고수했다. 그는 자기 몸이 피부에 싸인 해골처럼 보일 때까지 금식했고,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 밤에는 추위에 있었으며, 그의 몸을 그러한 고문 아래 복종시키며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극한의 인내를 하게 하는 고행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후에 그는 자신의 고행은 다른 어떤 고행자들 보다 훨씬 혹독했음을 말하며, 그러한 고행은 높은 지혜와 깨달음으로 이끌지 않고 오직 육체를 허약하게 하고 정신 요소들을 약하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그때 그는 지속적인 숙고와 깊은 조사로 몸을 균형 있게 돌보면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이 방법을 후에 ‘중도’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감각적 쾌락의 탐닉과 고행의 양 극단을 피하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로서 감각적 쾌락의 탐닉을, 금욕주의자로서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그 양극단은 끝은 허무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도의 방법을 따르려면 우선 몸의 힘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금욕적인 고행을 중단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서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보살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들을 이끌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보살을 돌보며 함께 했던 다른 5명의 고행자들은 보살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보자 기품 있는 이 고행자가 그의 노력을 포기하고 화려한 삶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비난하며 그를 떠났다. 


이제 그는 혼자가 되었고 완전한 고독은 진리에의 탐구를 외부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추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가로 갔다. 그리고 후에 보리수(깨달음의 나무)로 불리게 된 아스왓타 나무 아래 갈대로 자리를 만들어 다리를 교차하여 앉아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전에는 절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했다. 밤이 되면서 그의 명상단계는 점점 깊은 상태로 들어가 그의 마음은 완전한 고요함과 냉정함을 얻었다. 기록에 의하면 밤의 초경에 전생의 삶에 대한 기억으로 그의 집중된 마음을 향하게 했다. 점차 우주의 생멸을 반복하는 수많은 겁 동안 그가 경험한 무수한 과거 삶이 내면의 시각에 펼쳐졌다. 밤의 중경에 그는 천안으로 모든 존재가 그들의 업, 행위에 의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삶의 보게 되었다. 밤의 마지막에 그는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진실인 존재의 법칙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 그에 따라 그는 무지의 가장 미세한 장막을 그의 마음에서 걷어내었다. 새벽이 되었을 때 보리수 아래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이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살이 아닌, 완전히 깨달아 이번 생에서 다시는 죽음이 없는 경지를 성취한 분인 붓다가 되었다. 


막 깨달은 붓다는 몇 주 동안 더 보리수 아래에 머물면서 그가 발견한 진리인 담마의 다른 면을 숙고했다. 그때 그의 영적 경로에서 그의 깨달음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지, 아니면 숲 속에 고요히 머물며 해탈의 축복을 누리기만 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섰다. 처음에 그의 마음은 침묵을 지키는 쪽으로 기울었다. 왜냐하면, 그가 깨달은 진리는 너무나 심오해서 언어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노력은 그 자신을 단지 피로하게만 만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경전에는 이 이야기에 극적인 요소를 소개하고 있다. 붓다가 침묵하겠다고 결심을 한 그 순간 1000개 하늘 세계의 왕인 ‘브라흐마 사함빠띠’라는 천신이 만약 붓다가 침묵한다면 이 세상은 고통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는 해방의 길을 잃게 되고 혜택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천신은 천상에서 지구로 내려와 깨달은 성자인 붓다께 절을 하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담마를 가르칠 것을 붓다께 공손하게 간청했다. 


그때 붓다는 심오한 혜안으로 세상을 응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마치 각기 다른 상태의 연꽃과 같다는 것을 보았다. 어떤 연꽃은 물의 표면에 가까이 있어 태양빛을 받으면 물표면 위로 올라와 꽃을 만개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해탈과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단지 성스러운 가르침을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깊은 연민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세속으로 돌아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담마를 가르치겠다고 결심을 했다. 


처음으로 가르침을 전한 사람은 베나레스 근처 사르나뜨의 사슴 동산에 머물고 있고 몇 개월 전에 자신을 떠났던 붓다의 이전 수행 동료였다. 붓다는 그가 발견해낸 진리를 그들에게 설명했는데 그의 설법을 듣자 그들에게 담마에 대한 통찰 지혜가 생겼고 붓다의 첫 번째 제자들이 되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에 붓다의 추종자들은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재가자와 고행자를 막론하고 해탈에 대한 소식을 듣자 그들의 이전 교의를 버리고 그들 스스로 깨달은 붓다의 제자임을 선언했다. 


붓다는 나이 들었을 때도 매년 촌락으로 마을로 갠지스 평야의 도시들로 귀를 기울이는 모든 이에게 가르치려고 유행을 떠났다. 그는 오로지 우기의 3개월 동안만 정착했고, 그 후 다시 현재의 델리로부터 동쪽의 끝인 벵골까지 유행했다. 그는 비구와 비구니의 성스러운 공동체인 상가를 만들었고 그 상가를 위하여 그는 여러 가지 규정과 계율을 정하였다. (비구니 상가는 끊어졌지만, 비구 상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져서 아마도 자이나교단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단체일 것이다.) 또한, 붓다는 스승과 상가를 헌신적으로 후원하는 재자신도들을 끌어들였다. 


45년간의 역동적인 선교활동 후에, 80세의 고령의 나이에 북방의 도시인 꾸시나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많은 제자에 둘러싸여 그는 형성된 존재를 모두 떠나 남은 것이 없고 윤회 굴레의 속박을 영원히 단절한 완전한 열반(빠리 닙바나)에 들었다. 


붓다의 삶에서 각각의 주요 사건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이 사건들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아래와 같다. 


(1) 인간 존재의 가혹한 현실에 눈을 뜸. (태어난 존재의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속박에 대한 발견)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그의 깨달음은 우리가 우리 삶에서 매 순간 접하게 되는 늙음, 병듦, 죽음이라는 중대사를 잊어버리고, 쾌락과 사소한 이해관계의 수렁 속에서 살아가는 몽유병과 같은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의 깨달음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가 안락하다고 생각하여 안주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위험한 무지의 덮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의 깨달음은 우리가 자신의 젊음, 건강, 원기에 어리석게 심취하는 것에서 탈피할 것과 우리의 삶에서 당면한 죽음의 신에게 승리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차원의 성숙한 지혜를 일으키라고 요구한다. 


(2) 보살이 궁전을 버리고 떠난 위대한 포기 


부와 권력과 욕망을 버리고 출가한 것은 우리에게 가치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가치 중에서 깨달음과 생로병사에서의 해방에 대한 탐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목표는 우리가 보통 우선하여 추구하는 쾌락, 부, 권력보다 훨씬 숭고하며, 심지어 세속의 책임과 사회적 의무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것이 물론 붓다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집과 가족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붓다를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승려뿐만 아니라 많은 재가자도 포함되어 있고 독실한 재가신자들은 살아 있는 동안 높은 수준의 깨달음을 성취했다. 붓다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우리는 가장 값진 목표, 가장 생생한 현실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닙바나를 최우선으로 하는 척도에 따라 우리의 가치들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세속적인 의무를 요구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열망을 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 


(3) 보살의 6년 고행 


6년 고행은 우리에게 최상의 목표에 대한 탐구는 흔들림 없는 노력과 완전한 헌신이라 말하는 분투노력 해야 하는 고된 삶을 보여 준다. 다행히도 보살은 자기 학대와 같은 고행은 결실이 없는 수행법이란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는 고행의 방향으로는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타협하지 않는 진리의 추구는 상당한 노력이 강조된다. 진실함으로 최상의 목표인 깨달음에 대해 탐구를 하는 사람은 고난과 요구되는 수련과정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4) 붓다의 깨달음 


붓다의 깨달음은 극적인 지혜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인간의 실제 잠재된 고유의 성품이란 것을 가르쳐 준다. 사람은 외부의 도움이나 신의 은총 없이도 자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 그의 깨달음은 중도라는 분별 있는 현명한 절제라는 개념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 중도의 개념은 불교의 긴 역사 전체를 특징짓는 말이다. 진실의 탐구는 우리에게 힘든 과정이기에 실행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 속죄의 고행이나 처벌을 요구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승리는 몸을 고문하는것에서 얻어지지 않고 마음을 개발함에 의해 얻어지며 이것은 몸을 돌보는 것과 높은 정신적 기능을 개발하는 것의 조화를 훈련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5) 전법에 대한 결심 


붓다의 깨달음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하겠다는 결심은 또 다른 교훈을 준다. 그의 깨달음을 단지 간직하기만 할 것인가, 다른 이에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비판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그의 심장은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찼다. 숲 속의 평온을 뒤로하고 그는 벗어난 인간성을 해탈로 이끄는 짐을 스스로 지기로 했다. 이 결정은 이어지는 불교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어 오랜 불교 역사를 통해 연민의 정신은 붓다의 율법 시대의 가장 깊숙한 생기를 가진 정신의 심장박동이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여전히 무지의 어둠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담마의 축복을 나눠주고자 바다를 건너,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 전법 여행을 하게 하는 동기가 된 것이 바로 붓다의 연민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불교신자가 오직 그들보다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겸손한 배려의 행위로 연민을 표현하게 하였다. 


(6) 최후의 열반 


마지막으로 붓다의 죽음, 최후의 열반을 얻었을 때는 우리에게 한 번 더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무리 최고의 스승일지라도 붓다 스스로 항상 강조했듯이,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법칙의 예외가 아님을 보여 준다. 그의 죽음은 또한 우리에게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의 멈춤을 통해 오직 모든 것을 포기함에 의한 최상의 평화와 축복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더 이상의 죽음이 없고 조건 지어지지 않음을 성취하는 마지막 관문인 ‘닙바나’인 것이다. 


2. 붓다의 전도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이 인도 북동부의 광대한 지역의 모든 종파에서 추종자들을 얻고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오늘날에도 또한 생기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교가 더 많은 사람, 특히 그들 중 교육수준이 높고 사고수준이 깊어 계시적 종교의 주장에 무심해진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이러한 성장은 당대에 끼친 영향은 물론이고, 두 가지 중요한 면에서 이해되어 진다. 하나는 가르침의 목적이며 다른 하나는 방법론적 특징이다. 


(1) 가르침의 목적 


증명할 수 없는 교리를 믿어야 하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달리 붓다가 체계를 세운 가르침의 방법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인 ‘삶의 괴로움’에 바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바로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행복과 평온을 깨닫는다는 것을 약속한다. 이것 이외에 형이상학적인 추론이나 이론적인 교리, 제례나 의례 방법 등 다른 모든 관심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붓다는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부적절한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축해 버린다. 


이러한 담마(가르침)의 실용적인 취지는 경전에서 빈번히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 때 말룽카뿟따라는 이름의 비구가 세상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 영원한지 유한한지, 사후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등의 방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붓다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거절해온 것에 불행함을 느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스승에게 찾아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해주든지 아니면 자신이 상가(붓다의 제자들 모임)를 떠나겠다고 말을 했다. 


붓다는 그때 말룽카뿟따에게 영적인 삶은 성스러운 길로 가는 실질적인 도전에 혼란만 주는 그러한 어떤 질문에도 의존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독화살에 맞은 사람에 비유하였다. “독화살에 맞은 사람을 의사에게 데려갔을 때, 그 사람은 의사에게 ‘나에게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군지, 그가 사용한 화살은 어떤 형태이고, 재료는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독이 사용되었는지 등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나는 화살을 제거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남자는 화살이 제거되지 전에 먼저 죽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란 고통의 화살을 맞은 사람은 해탈의 길을 결코 발견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라고 붓다는 말했다. 


붓다는 고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어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문제를 비범한 정도의 정신적 통찰력으로 드러냈다. 마치 정신의학자처럼 붓다는 우리 마음에 내재한 고통의 뿌리인 갈애와 집착을 향해 추적했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 또한 우리의 마음에서 찾아야만 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으려고 신에게 기도하고, 성스러운 물건에 예배하고, 의식이나 제례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고통은 우리 자신의 정신적 오염인 번뇌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탐욕과 성냄과 무지라는 우리 마음속의 번뇌를 청정하게 만들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우리는 심원한 내면의 정직성이 필요하다. 


다른 종교들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나 영원하고 보편적인 자아나 신과의 합일에 대한 견고한 자아 이론처럼 밖을 향하게 할 때, 붓다는 이러한 개념들에 단호히 반대하며 우리의 내면으로 돌아가도록 가르쳤고 항상 그의 가르침을 경험에 근거한 분명한 사실과 일치시켰다. 붓다는 마음을 그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우리의 행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 마음이고, 우리의 운명을 만드는 것 또한 마음이며,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비참하게 만드는것 역시 마음이라고 말한다. 가르침의 출발점은 고통의 대상이고 속박된 평범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끝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청정함이 있는 깨달은 마음이다. 이러한 전체 가르침은 가장 곧고 빠른 방법으로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펼쳐진다. 


(2)가르침의 특징 


1) 자신에게 의지하기 


붓다의 가르침 목적에 대한 이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의 특징들을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가르침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신심리학적인 방향과 매우 유사한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의지할 것을 강조한다. 붓다에게 있어서 해탈로 가는 열쇠는 정신적 청정함과 바른 견해이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외부 권위에 의해 구원을 얻는 개념을 거부한다. 붓다는 ‘스스로 불선한 행위를 함에 의해 스스로 오염되고, 스스로 불선한 행위를 하지 않기에 스스로 청정해진다고 말한다. 청정과 오염은 자기 자신에 달린 것이지 어떤 누구도 다른 이를 청정하게 할 수 없다.’라고 담마빠다(법구경) 165 게송으로 설했다.  


이러한 우리 스스로 해방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의 노력에 대한 강조는 초기 불교의 특징적인 모습이고 인간의 잠재능력에 대한 확고한 단언이다. 붓다는 스스로 어떠한 신령스런 경지를 강조하지 않았고 또한 인간을 구원하는 대리인임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단지 스승이고 안내자로서 스스로 자처했다. “ 너 스스로 노력해야만 한다. 붓다는 단지 길을 가리킬 뿐이다. 명상과 수행으로 성스러운 길을 가는 자는 누구나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담마빠다 276) 그는 또한 “너 스스로 섬이 되고, 너 스스로 피난처가 되어라, 다른 외부에서 피난처를 구하지 마라.”라며 제자들을 독려했다. 심지어 그의 임종 앞에서도 제자들에게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붕괴하고 사라진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목적을 성취하라.”라는 마지막 조언을 했다. 


2) 경험의 강조 


통찰 또는 지혜는 깨달음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붓다는 항상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권위에의 복종이나 조건 없는 믿음이 아닌 그들 자신의 이해에 기초하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그의 담마를 ‘에히빳시꼬’, 즉 ‘너 스스로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그는 탐구자에게 그들 스스로 지혜와 이성의 빛으로 그의 담마를 조사하라고 그들 스스로 진리의 확신을 얻으라고 초대한다. 그래서 붓다의 담마는 ‘빳짯땅 웨디땁보윈뉴히’ 즉 ‘현명한자 스스로 깨닫는 가르침’이라고 말해지며, 이것에는 지혜와 지속하는 탐구가 필요하다. 


한때 붓다는 많은 다른 종파의 수행자들이 있는 ‘깔라마’라 불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는 각 종파의 스승들은 모두 자신의 가르침을 하늘 높이 칭송했고, 다른 종파의 가르침은 헐뜯었다. 그 결과 깔라마 사람들은 완전히 혼돈 속에 있었다. 그래서 붓다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붓다께 그들의 딜레마를 말하며 조언을 구했다. 


붓다는 그 자신의 가르침을 칭송하지 않았고 다른 종파의 가르침을 공격하지 않고 대신 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대들은 당연히 의심스러울 것이다. 미덥지 못한 곳에 의심이 일어난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맹목적으로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마라. 대신 스스로 그 가르침을 조사하라. 그대들 스스로 ‘그것은 해로운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하며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거부하라. 그리고 그대들 스스로 ‘그것은 유익하고 칭찬할 만하며, 이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수행 실천하라." (앙굿따라니까야3:65) 


3) 보편타당성  


붓다는 모든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문제인 괴로움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는 항상 보편적인 교훈으로, 오직 인간의 이성에 따라 인류에게 가르침을 전한다. 인도에서 희생과 제례를 수행하는 특권층인 브라만들이 보존해 온 가르침인 베다 경전의 기록을 보면 붓다는 당시의 인도에서 뛰어난 종교적인 가르침을 전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더 행복한 삶으로 환생할 수 있기를 바라며 겸손한 마음을 갖고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말해지고 그 결과로서 그들은 성스러운 가르침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붓다는 담마를 배우는 사람들에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는다. 그는 어떤 사람의 성스러운 지위를 규정짓는 것은 그 사람 개인의 행위에 의한 것이지 그의 혈통이나 카스트제도의 계급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따라서 그는 브라만, 왕과 왕자, 상인, 농부, 노동자, 심지어 천민까지도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해탈의 문을 열어 놓았다. 어떠한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꺼이 담마를 가르쳤고,그 결과 많은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광대한 인도 사회 안에서 붓다는 카스트 제도를 폐지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카스트 제도가 복잡하게 발전한 단계는 아니었고, 매우 억압적인 체계로 바뀐 것은 몇 세기 후의 일이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붓다는 단호하게 태생이 그 사람의 신분과 가치를 정한다는 정통 브라만교의 견해를 거부했다. 상가 공동체 안에서 그는 모든 사회적 계층의 구분을 전혀 두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마치 바다로 흘러가는 4개의 큰 강이 바다에 이르면 모두하나의 바다로 알려지듯이, 자신의 가르침에 들어와 비구가 된 4계급의 모든 사람 역시 붓다의 제자로서 불리게 된다고 말했다. 


보편주의적 특징이 다른 분야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은 여성에게도 똑같이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추종자 중에는 성스러운 가르침은 남자만의 것이라 주장한다. 여자는 오직 가정의 허드렛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과 자식을 돌보는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우파니샤드의 가르침과 베다 의례를 수행하는 것 역시 남자만의 특권으로 여성을 배제했다. 반면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남자 여자 모두에게 기꺼이 가르쳤다. 처음에 붓다는 여성의 비구니 상가를 만드는 것에 대해 당시에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주저했다. 그러나 비구니 상가를 만드는 것에 동의하자 공주, 주부, 좋은 가문의 딸, 하녀, 심지어 과거 매춘부까지 모든 계층의 여성들이 출가했고, 많은 여성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했다. 


4) 윤리 도덕적인 계 


붓다의 보편주의적인 다른 면은 특별하게 언급할 만하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 윤리의 개념을 담은 ‘계’이다. 문명사회가 만들어지던 때부터 다른 여러 종류의 도덕적인 계들이 만들어졌기에, 도덕적 계를 붓다가 처음 제정한 종교 지도자로 말하는 것은 너무 과장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구성한 공공의 관습과 사회의 복잡한 체계로부터 진실한 도덕 원칙을 분리해낸 가장 최초의 스승 중 한 분이 붓다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교묘한 궤변적인 사상에서 붓다는 우리에게 도덕성을 갖춘 기본 계를 기준으로 정하며 추상적인 원칙을 제공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결심해야 하는지를, 바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서 사용하라(아따낭 우빠망 까뜨와)는 원칙이다. 이 추상적인 원칙에서 그의 도덕적 계의 주요 4개 계목인 ‘생명을 죽이는 것, 물건을 훔치는 것, 잘못된 성행위를 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을 삼가라.’라는 계목을 만들었다. 개개인의 행복과 공동생활의 조화에 관심을 둔 붓다는 ‘중독성 물질을 삼가라.’라는 5번째 계목을 더하여 모두 5개의 계인 빤짜실라를 불교의 기본 계목으로 정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도덕성을 단순히 사유에 바탕을 둔 규칙의 나열로 보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행위가 개인의 운명으로 연결되는 보편적인 법칙을 가르쳤으며 도덕적 정의가 결국 세상을 지배하게 됨을 분명히 밝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도한 행위가 윤회의 형태와 삶의 여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결정한다는 업과 업의 결과 법칙이다. 이 법칙의 작용은 모든 곳에 적용되어 어떤 누구도 그 법칙의 예외가 될 수 없다. 신분이나 선호함에 관계없이 모든 존재에게 똑같이 작용한다. 도덕성의 법칙을 어기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귀족이건 천민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같은 불선한 업을 갖게 되고 그에 따른 결과로 반드시 비참하고 나쁜 곳에 윤회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반면 선하고 가치 있는 행위를 통해 도덕성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선한 업을 갖게 되어 그에 따른 결과로 미래의 이익으로서 행복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고, 최후의 해탈을 향해 진보해 나가게 된다. 


가르침에서의 정신적인 방침에 한결같이 붓다는 도덕성의 개인적인 근원에 특별한 관심을 뒀다. 그는 비도덕적 행위의 기원을 세 가지 불선의 뿌리라 불리는 탐욕, 미움, 무지의 삼독심으로 더듬어 올라가 조사했다. 그리고 그는 도덕적 행위의 기원은 그 반대인 세 가지 선함의 뿌리인 탐욕 없음 또는 관대함, 미움 없음 또는 자애, 무지 없음 또는 지혜로 더듬어 올라가 조사했다. 그는 또한 천상의 신성한 삶(브라흐마 위하라)으로 이끄는 4가지 고결한 마음 명상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더 정제되어 윤리적으로 청정해지도록 이끌었다. 4가지 마음의 첫 번째는 모든 존재의 행복과 복지를 바라는 자애(멧따)이고, 두 번째는 모든 고통에 빠진 이들이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까루나)이고, 세 번째는 다른 이의 성공과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이타적인 기쁨(무디따)이며, 네 번째는 치우치지 않은 마음은 평정(우뻭카)이다. 이 네 가지 태도는 모든 존재에 대해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개발되어 진다. 


5) 약처방과 같은 가르침 방편의 능숙함 


이 글을 마감하기 전에 붓다의 심오한 가르침 방법을 더 언급해 본다면, 유능한 의사의 처방처럼 가르침의 방편에 능숙함이다. 그는 깊은 명상의 신통력과 깨달음의 지혜를 이용하여 붓다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정확한 방법을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갖췄다. 그는 개인의 깊숙이 감추어진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그 개인의 성향이나 관심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 사람의 수준에 맞게 각각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정확하고 필요한 가르침을 고안해 냈다. 경전에는 붓다가 행한 많은 최고의 교수법 사례들로 넘쳐난다. 유명한 두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첫 번째는 앙굴리말라의 경우로, 그는 꼬살라 국의 수도 사왓티의 외곽 숲에 사는 살인자였다. (그는 유능한 수행자였으나 살인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따랐다.) 그는 여행자를 계속 살해하여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에 꿰어 목에 둘렀다. 그가 수백 명의 사람을 죽였기에 나라 전체를 공포 속으로 몰아갔다. 그는 생포하거나 죽여도 좋은 현상범이었으나 누구도 그를 추격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붓다는 천안의 눈으로 끔찍한 살인자인 앙굴리말라가성인인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다른 측면을 보았기에, 어느 날 홀로 앙굴리말라가 거주하는 숲으로 향했다.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보았을 때, ‘이 수행자를 지금 죽여 내 목걸이를 완성할 손가락을 잘라 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그는 칼을 하늘로 치켜들고 붓다를 쫓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빨리 쫓아가도 붓다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붓다는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그의 신통력에 의해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뛰고 또 뛰었지만 한 뼘조차도 다가설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멈춰라, 수행자여 멈춰라.’라며 소리를 쳤다. 그때 붓다는 ‘나는 이미 멈췄다. 앙굴리말라여, 그대 역시 멈춰라.’ 


이 말은 살인자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며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수행자가 유명한 스승으로 깨달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붓다가 연민으로 그의 끔찍한 행위로부터 그를 구하려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칼을 던져버리고 붓다의 발아래 엎드려 절을 했고, 비구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붓다는 그를 상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고 짧은 기간 안에 앙굴리말라는 완전한 지혜와 깊은 연민을 가진 아라한이 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끼사고따미’라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녀가 부유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지만, 아이를 갖지를 못했다. 그래서 시댁 가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해 매우 비참함을 느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임신하고 그녀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는 아들을 낳게 되었다. 가족의 부를 이끌어 갈 상속자를 갖게 되자 다른 가족들 모두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 몇 개월 지나 죽게 되자 끼사고따미는 미쳐버렸다. 그녀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아픈 것이라 스스로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치료할 약을 구하러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그녀를 놀려댔고 미친 여자라고 학대했다. 마침내 그녀가 붓다의 앞에 다가갔다. 그녀가 붓다께 약을 요청했을 때 붓다는 그녀의 마음을 바꾸게 할 무상에 대해 설법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그녀에게 아들을 위한 확실한 약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먼저 그녀가 약을 위한 재료인 누구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구한 겨자씨 하나를 가져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큰 희망을 품게 되어 집집이 겨자씨를 구하러 찾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겨자씨를 쉽사리 모두 주었지만, 그녀가 사람들에게 집에서 죽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여기는 아버지가 죽었고, 여기는 어머니가, 여기는 아내가, 여기는 남편이, 형제가, 자매가, 등등이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태어난 존재들의 공통적인 운명임을 알게 되어, 그녀의 아들에게 닥친 재난 역시 유일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보편적 법칙인 무상을 깨닫고 붓다에게 돌아왔다. 붓다는 돌아오는 그녀를 보고 ‘겨자씨를 구했는가, 고따미?’하고 묻자 고따미는 ‘겨자씨를 구하는 일은 그만두었습니다. 제가 비구니가 되어 저의 의지처가 되어주십시오.’라고 대답을 했고, 붓다는 그녀를 비구니로서 받아들였다. 후에 그녀는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여 비구니 상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비구니 중 한 명이 되었다. 

요약하면, 붓다의 목적은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며 최상의 깨달음인 닙바나라는 정신성의 완성으로 이끄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지성과 자주성을 완전히 존중하는 상태이기도 한 정신적 완성을 우리가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제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의 접근은 정신심리적으로 근원적이며, 비독단적이며, 실질적이며, 개방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노력과 도덕적 올바름,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정신적 성장의 잠재성과 나아가 더욱 높은 최상의 깨달음 역시 바른 노력을 하는 모든 이가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그의 가르침을 설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2500년 전의 오래된 붓다의 가르침이 생각과 가치관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이런 시대에서도. 이 시대 사람들의 현대적인 취향에도 들어맞아 여전히 타당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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