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깨달음이란 무엇인가?(2) / 빤냐완따 스님

관리자
2021-04-21
조회수 974

2012. 6. 6. 법문


2. 대승불교와 선(禪)불교에서 보는 깨달음


대승불교에서는 3보(三寶)가 아닌 불보(佛寶) 하나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대승을 표방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경우 예식을 행할 때 삼보의례로서 삼귀의 ‧ 거불 ‧ 삼보통청문 등을 독송하는 정도이고, 실제의 신행생활에서는 법보나 승보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이지 않다. 믿음의 측면에서도 테라와다불교는 붓다 ‧ 담마 ‧ 상가에 대한 깊은 존경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수행의 길로 나아가는 반면 대승불교는 삼보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보다는 법신불(法身佛) 사상을 통해 붓다의 개념을 다양한 형태로 확장시키면서 그 분 붓다들의 원력과 지혜에 대한 믿음과 증득을 강조한다.  


대승불교는 수행의 근본체계로서 6바라밀을 제시하고 있다. 6바라밀의 정상에는 지혜바라밀이 있다. 대승불교는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실천적 이념의 바탕 위에서 존재의 공성(空性)을 지혜바라밀로써 완전하게 깨달아 구경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것이 성불이요, 부처인 것이다. 여기서 ‘부처’는 고유명사 ‘부처님’과는 구별되는 것이나 지혜의 격에 있어서는 동격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성불의 지혜를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빨리어로 아눗따라 삼마삼보디),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하고, 범부가 6바라밀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인식되어져 있다. 깨닫고 나면 붓다(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라고 하며, 그 깨달음에 이르게 한 지혜를 ‘여래지(如來智)’라 한다. 그래서 근기가 수승한 수행자는 단박에 깨달아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일초직입여래지(一抄直入如來智)’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여기서 ‘여래지(如來智)’에 이른 수행자(혹은 보살)는 무량복덕을 갖춘 부처님과는 차별되지만, 지혜의 측면에서 고따마 붓다께서 증득한 완전한 지혜와의 동격을 의미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방불교, 특히 중국 ‧ 한국 ‧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선불교(禪佛敎) 전통에서는 붓다께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고 인식하고는 있으나, 중론(中論)이나 유식(唯識) 등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나 지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스승(선지식,禪知識)은 다만 수행자로 하여금 ‘자성청정(自性淸淨)’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등으로 제시되고 있는 마음의 본성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 뿐, 수행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지양한다. 즉, 그 어떤 이해나 선입견, 혹은 앎(알음알이)이나 분석 등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음은 곧바로 들어가 보고 깨닫는 것이지 사량분별 해서 깨달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헤아림과 분별이 끊어지고 마음의 길이 소멸된 곳, 나아갈래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곳, 그곳에서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유도한다. 가다가 ‘부처의 경계를 만나면 부처를, 조사의 경계를 만나면 조사를,,,’ 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개념(산냐, saññā)이나 알음알이에 빠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스스로 견성(見性)했다고 판단되면 견성의 감흥을 오도송(悟道頌)이라는 형식에 담아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확인받는다. 이를 일러 ‘한소식 했다’고 한다. ‘화두를 타파했다’ ‘마음을 밝혔다’ 라고도 하고, 생각마다 일체 경계에 대해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면 ‘확철대오(確澈大悟)했다’고도 한다. 선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인가의 확인과정에서 悟 ‧ 見性 ‧ 得道라는 한자어를 주로 쓰고 있고, 한글로는 한결같이 ‘깨달음’으로 옮기고 있다. 더 나아가, 열반 혹은 구경열반이라고 하는 궁극의 상태를 깨달음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3. 테라와다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인식


‘깨달음’ 이란 용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깨달음’은 원래 빨리어 ‘bodhi ‧ buddhi' 의 한글번역이다. ‘buddha’는 ‘깨달은 자, 초월자’로 번역되거나 형용사 ‘깨달은 ‧ 이해된 ‧ 현명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역 아함경에선 ‘bodhi’를 ‘菩提’로 음사하면서 覺(깨달을 각)으로 번역했고, 이 번역을 한국에서는 ‘깨달음’으로 옮겨 쓰고 있다. 그러나 실재로 인도인들에게 ‘buddha’의 뜻을 설문해보면, 대부분 ‘깨달음’의 개념보다는 ‘잘 이해한’ ‘현명한 사람’ 등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글 ‘깨달음’은 ‘(틀을)깨다 ‧ (잠에서)깨어나다 ‧ break ‧ awake’와 ‘닿다 ‧ 다다르다 ‧ touch ‧ reach’의 복합어다. 즉, 정신이 깨어나서 실재에 가 닿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어 사전에서는 ‘깨어서 본다’는 의미를 지닌 覺 보다는 ‘내 마음을 깨닫는다’라는 의미의 ‘悟(깨달을 오)’를 즐겨 쓴다. 悟와 더불어 得道라는 어휘도 悟의 동의어로 종종 쓰인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깨달음의 의미로 보통 悟 ‧ 悟道 ‧ 得道라고 표기하고 있고, 覺 ‧ 覺道를 동의어 정도로 병기하고 있다. 영어권에서 ‘깨어있음 ‧ 높은 인식의 상태에 도달함’(be spiritually awakened ‧ attain enlightenment, higher perception)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수행자들에 대해 ‘bodhi, buddhi ’ ‧ ‘buddha’ 즉, ‘깨달음’ ‘깨달은 분’ 혹은 ’깨달았다‘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bodhi나 buddha 보다는 오히려, 붓다께서 8정도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삼마딧티(sammadiṭṭhi, 正見, 올바른 견해, 올바른 봄)나 지혜의 증득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면, 그 수행자는(The yogi is) 지혜를 증득했다(gained enlightenment), 담마를 체험했다(experienced Dhamma), 담마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keeping clear comprehension of Dhamma), 정견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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