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 1차 결집
결집(Saṅgīti, Saṅgayana)의 의미
붓다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붓다가 설한 가르침을 모두 모아 기억하기 쉽게 몇 개의 섹션으로 나누는 방법이 취해졌습니다. 참가한 대중 전원이 완전하게 합의할 때까지 철저하게 질의응답을 반복하며 검토했습니다. 합의를 얻으면 승인하고 확립하기 위해서 붓다의 말씀을 합송 낭독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붓다의 말씀이 기억되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한 문헌의 기준이 되어 집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집이라는 것은 합송 낭독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집 또는 합송이라고 하는 방법은 붓다 생존시부터 붓다의 제일 제자인 서리뿟따존자에 의해 행하고 있었습니다. 서리뿟따존자는 붓다와 그 제자들 앞에서 스승의 말을 집성해서 각 항목의 수에 근거해 1의 그룹으로부터 10의 그룹까지 법수에 따라 정리해 말했습니다. 서리뿟따존자가 암송을 끝내자 붓다는 이에 동의하면서 합송하는 방법을 잘 설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장부경전 33번경 Saṅgīti sutta)
또 다른 장부경전에서는 자이나교의 지도자가 돌아가자 법과 율의 문제로 교단이 둘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붓다가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안 뒤에 설한 담마를 함께 모여 평등하게 의미와 의미를(atthena atthaṁ), 자구와 자구를(vyañjanena vyañjanaṁ) 비교하며 합송하라(saṅgāyati).”고 하셨습니다. (장부경전 29번경 Pāsādika sutta)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을 보존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을 Tipitaka(삼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Tipitaka', 라는 말은 '세 바구니'(TI는 3 + pitaka는 바구니)를 의미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Suttanta Pitaka로 알려져 있으며 법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Vinaya Pitaka라고 하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화합하고 청정하기 위한 모든 규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Abhidhamma Pitaka로 알려져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윤리 철학적인 담론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것들은 기억한 것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순조롭게 진행하여 암송으로 스승이 제자에서 전하여 졌습니다.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친, 여러 사람의 능력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처님이 설한 Dhamma와 Vinaya는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었습니다.
이 빨리어 Tipitaka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사실 이 시대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나아가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들의 신심과 노력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줄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담마를 가르치면, 제자들인 상가는 암송을 통해 정확하게 그 담마를 토씨하나 안 틀리게 다른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Tipitaka에 묶어 변함없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전하였기에 Theravada라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훼손되거나 변질될 상황이 되거나 그런 우려가 있으면 장로들은 상가회의라는 결집을 거쳐 다시금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가회의는 부처님 입멸 후 지금까지 6번을 거쳐 왔습니다. 이 상가회의를 우리들은 부처님의 담마를 확립하기 위한 결집들('Dhamma Sangitis')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결집은 승가의 장로에 의해 암송되었고, 그 다음에 다시금 모든 참석 승려들의 합송이 뒤따라서, 그 암송된 것들이 정확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만장일치로 결집 대중 구성원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제 1차 결집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상가가 분열될 위협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꼬삼비의 두 비구스님간의 다툼과 부처님의 사촌 데와닷따(devadatta)와의 대립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돌아간 후에 상가 분열의 위기나 담마의 그릇된 해석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그룹 중의 하나인 수밧다(subhadda)라는 비구스님은 부처님이 완전하게 열반하신 것을 슬퍼하고 있던 비구스님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스승께서는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구스님들은 부처님에게 더 이상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연장자인 마하깟사빠(Mahākassapa) 스님이 수밧다의 이 의견을 들었을 때,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담마는 쇠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개의 piṭaka(Sutta와 Vinaya)를 편찬하려는 의도로 붓다의 입멸 7일후에 비구스님들에게 결집모임을 청했고, 결집할 장소와 시기, 기간, 그리고 참가 대중선별을 비구들의 동의를 얻어 결정했습니다. 이 첫 번째의 상가모임이 제1차 불교결집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결집의 동기가 진정한 담마의 쇠퇴 가능성에 대한 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마하깟사빠 스님은 부처님의 가사를 받은 유일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연장자 스님으로서의 권한으로 제1차 결집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두타행 수행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승보다 더 새 가사를 입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과 옷을 교환했습니다. 후에 어쩌다 일어난 이 일이 권위 양도의 상징적 의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1차 결집을 열게 된 동기가 수밧다 스님의 발언으로부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1차 결집에서 우빨리는 vinaya를, 아난다는 sutta를 암송할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우빨리가 율을 암송할 책임을 맡은 것은 이발사 출신이기에 부처님이 계를 줄때 출가할 사람의 머리를 깎는 임무를 행하면서 출가를 증명할 대중에 항상 포함되어 있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율을 완전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난다가 최초의 불교결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낭송하도록 선택되었던 것은 25년 동안 부처님을 시봉한 수행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그에게 시자를 요청하자 아난다는 어떤 조건만 허락되면 기꺼이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조건 중의 하나는 부처님이 성도 후 20년 동안 무슨 설법을 했던 그에게 다시 반복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난다야말로 제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낭송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sutta)은 “Evaṁ me suttaṁ” 이라는 구절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내(아난다)가 들은 바로는”라는 뜻입니다.
제 1차 결집에 아난다가 경을 낭송하는 자로 뽑힌 것은 부처님의 주시봉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을 들어서 아는 최초의 연장자 스님이란 점을 모든 비구스님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뽑혔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는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 시봉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그는 부처님께 너무 인간적으로 가까웠을 것입니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아난다에게 아라한이 되라고 다그치자 그가 얼마나 빨리 아라한이 되었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경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Suttas(Suttantika)나 vinayas를 계속 암기하는 다섯 명의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Dighabhāṇakā, Majjhimabhāṇakā, Saṁyuttabhāṇakā, Anguttarabhāṇakā 그리고 Vinayadhara가 그들입니다. Khuddakanikāya를 위한 전문가는 생략되었습니다.
Dighabhā ṇakā에 의하면 아난다는 걸어서 혼자 결집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Majjhimabhāṇakā에 따르면 땅 속으로 돌진하더니 결집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난다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묘사는 테라와다 구전에서도 아라한의 미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경우들이 Tripiṭaka에서 발견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그룹에서 아라한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비구니 스님은 초청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이미 아라한에 도달한 재가자들이 초청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uposatha(포살) 날에 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은 서로 따로 모여 pāṭimokkha(계본)을 독송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이라도 출가자인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따로따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의식이기에 비구니 스님들이 초청되지 않은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Gahapati Saṁyutta에서 언급한 아라한을 이룬 재가 신도들 또한 있었지만, 포살이 진행될 동안에는 비록 아라한에 이른 재가자라 하더라도 그 의식에 참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후일 이런 재가자들에 대한 그릇된 대접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의지와 동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엔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상가라는 말은 bhikkhu, bhikkhuni, upāsaka, upāsika, 4그룹의 모든 불자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데 있어 그들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재가자들은 가정을 가진 사람들로서 스님들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뿐이라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 출가가 더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해석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선 출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오늘날의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조직인 상가를 만드신 목적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이라도 평등하게 참여하여,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담마 수행에 좀 더 편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은 인도 역사상 여자(비구니)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연장자 아라한 비구니라 할지라도 가장 나이 어린 비구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부처님께서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상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상가 안에서는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스님들은 부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길잡이로서 dhamma(법)와 vinaya(율)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결집에서 sutta와 vinaya의 다섯 가지 길잡이(보호자)가 생겼습니다.
Upāli는 vinaya의 보호자가 되었고,
Ānanda는 Dīgha-nikāya,
Sāriputta의 제자들은 Majjhima-nikāya,
Mahā kassapa는 Saṁyuṭṭa-nikāya,
Anuruddha는 Aṅguttara-nikāya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들은 sutta와 vinaya를 암기, 보존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을 모든 다른 nikāya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dīgha-nikāya의 34경, Majjhima-nikāya의 154경, Saṁyutta-nikāya의 대응 경들과 Aṅguttara-nikāya의 번호로 정리된 경들이 그것들니다.
부처님께서는 담마를 이해하는 그릇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방법으로 전함에도, 점진적 가르침(Ānupubbīkathā)이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에게 paṭiccasamuppāda(연기)에 대하여 설명할 때, 보시(dāna) 와 지계(sīla)를 함으로써 천상(sagga)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dāna와 sīla는 원인을 가리키며, 반면 sagga는 그것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dānakathā, sīlakathā 그리고 saggakathā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그러나 매우 효과적으로 근본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제 1차 불교 결집의 성과는 sutta piṭaka와 vinaya piṭaka의 편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piṭaka인가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Dīgha-nikāya에 있는 유명한 경전인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의 끝부분에서 부처님의 시신은 다비 후에 여덟 부분(aṭṭhadoṇa)으로 나누어졌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에 대한 주석서에 의하면, 유골이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이 언급은 스리랑카에서 덧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Dīgha-nikāya(장부경전)에 있는 대반열반경이 BC 3세기에 thera mahinda(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전해 진 후에, 스리랑카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뒷부분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비구 스님들은 Mahā vihara(대사)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부분은 Mahā vihara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전 끝에 덧붙여졌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대반열반경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경전의 원래의 부분에 스리랑카에서 만든 추가분을 더한 것입니다.
다른 예로는, Buddhavaṁsa(불종성경)는 28장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석서는 26장까지 뿐입니다. 이것은 불종성경에 대한 주석서가 인도에서 써졌을 때까지는 불종성경도 27, 28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종성경을 바탕으로 그 주석서를 쓴 사람은 26장 이외에 27장, 28장의 주석서는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불종성경은 28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27장, 28장이 스리랑카에서 Mahā vihara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tripiṭaka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tripiṭaka와 똑 같은 것일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tripiṭaka와 똑같다고도 이해해야 합니다.
제1차 결집에서 500명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Sutta와 Vinaya가 완성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오늘날 우리가 “Buddhavacana”(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들을 보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세번째 모음집인 Abhidhamma는 제1차 결집에서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에 편찬되었습니다. BC 3세기 아소까왕 시절에 열린 제3차 불교결집에서 회의의 의장이 된 Moggaliputta-Tissa 비구 스님이 Abhidhamma piṭaka 7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Kathā vatthu (논사)라는 책을 썼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것으로 Abhidhamma piṭaka 7권은 불교 합송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제1차 결집의 말미에는 부수적으로 아난다의 5가지 과실에 대한 문책과 변론 및 참회가 행해지고 이를 대중들이 수용하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화합하지 못하는 찬나(Channa)에 대한 범단법(Brahmadaṇda)의 제재 조치가 결의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제 1차 결집이 모두 이루어지게 됩니다.
Vinaya piṭaka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제1차 결집은 부처님 열반 3개월 후에 열렸고, 그 결과 붓다의 Dhamma와 vinaya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집을 전후하여 비구스님들 사이에 대립과 이견이 있었습니다. 결집을 마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Puraṇa라는 스님에게 그 결집에 만족하는지 물었습니다. 뿌라나 스님은 “나는 결집에서 편찬한 모음집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들은 담마 만을 따를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Puraṇa 장로의 불만에 관한 이야기는 제1차 결집 후에 스님들 사이의 불화에 관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결집 직후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후에 비구 스님들이 다른 종파로 분열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부처님의 담마는 포교의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60명의 제자들이 담마의 전파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을 때, 스님마다 각각의 장소에서 다른 조건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날씨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심지어는 인도 대륙은 거대해서 시간대까지 달랐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후에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227가지의 vinaya(계율)을 어느 하나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직면한 조건에 맞추어 사소한 계율들을 바꾸어야만 했던 스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하 깟사빠 존자는 vinaya의 어느 한 부분도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제1차 결집에서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1. 아빤냣떼 나 빤냐뻬땁베, 부처님께서 정하시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마라.
2. 빤냐떼 나 사뭇친디땁베,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마라.
3. 야타빤냣떼수 식카빠데수 식키땁베, 부처님께서 정하신 원칙을 하나도 변형시키지 마라
부처님 말씀의 합송이 붓다의 생존 중에 행해졌다면 붓다는 그것을 상기띠 숫따에서처럼 승인했겠지만, 붓다의 입멸 후이기 때문에 제일 결집이후 붓다의 말을 구두로 정확하고 확실하게 보존해야 할 책임이 아라한들에게 남겨졌습니다. 운집한 아라한들이 합의에 이르면 모두가 부처님 말씀을 합송으로 낭독해서 그것이 계승되어 지도록 기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제1차 결집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억된 부처님 말씀은 결집 이후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제1차 결집의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합송 낭독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보존을 맡은 승려들이 기억해야 할 부분을 할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1차 결집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집(붓다의 말씀을 편성해서 합송 낭독하는 것)입니다. 이후의 결집은 이것을 확인하는 회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 후의 결집에서는 회의에 모인 승려들이 제1차 결집에서 모아진 스승의 말을 상처없이 개변하는 일 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서로 조사하기 위해서 소집된 회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1차 결집을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신 500명 아라한들의 참여로 이루어졌기에 Pancasatika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 역사적인 결집의 자세한 것은 Cullavagga Vinaya Pitaka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제 1차 결집
결집(Saṅgīti, Saṅgayana)의 의미
붓다의 말씀을 보존하기 위해서 붓다가 설한 가르침을 모두 모아 기억하기 쉽게 몇 개의 섹션으로 나누는 방법이 취해졌습니다. 참가한 대중 전원이 완전하게 합의할 때까지 철저하게 질의응답을 반복하며 검토했습니다. 합의를 얻으면 승인하고 확립하기 위해서 붓다의 말씀을 합송 낭독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붓다의 말씀이 기억되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위한 문헌의 기준이 되어 집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집이라는 것은 합송 낭독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집 또는 합송이라고 하는 방법은 붓다 생존시부터 붓다의 제일 제자인 서리뿟따존자에 의해 행하고 있었습니다. 서리뿟따존자는 붓다와 그 제자들 앞에서 스승의 말을 집성해서 각 항목의 수에 근거해 1의 그룹으로부터 10의 그룹까지 법수에 따라 정리해 말했습니다. 서리뿟따존자가 암송을 끝내자 붓다는 이에 동의하면서 합송하는 방법을 잘 설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장부경전 33번경 Saṅgīti sutta)
또 다른 장부경전에서는 자이나교의 지도자가 돌아가자 법과 율의 문제로 교단이 둘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붓다가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최상의 지혜로 안 뒤에 설한 담마를 함께 모여 평등하게 의미와 의미를(atthena atthaṁ), 자구와 자구를(vyañjanena vyañjanaṁ) 비교하며 합송하라(saṅgāyati).”고 하셨습니다. (장부경전 29번경 Pāsādika sutta)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을 보존하여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을 Tipitaka(삼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Tipitaka', 라는 말은 '세 바구니'(TI는 3 + pitaka는 바구니)를 의미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Suttanta Pitaka로 알려져 있으며 법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Vinaya Pitaka라고 하며 부처님의 제자들이 화합하고 청정하기 위한 모든 규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Abhidhamma Pitaka로 알려져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윤리 철학적인 담론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것들은 기억한 것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순조롭게 진행하여 암송으로 스승이 제자에서 전하여 졌습니다. 이렇게 여러 세대에 걸친, 여러 사람의 능력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처님이 설한 Dhamma와 Vinaya는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었습니다.
이 빨리어 Tipitaka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사실 이 시대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고, 나아가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들의 신심과 노력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줄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담마를 가르치면, 제자들인 상가는 암송을 통해 정확하게 그 담마를 토씨하나 안 틀리게 다른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Tipitaka에 묶어 변함없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전하였기에 Theravada라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훼손되거나 변질될 상황이 되거나 그런 우려가 있으면 장로들은 상가회의라는 결집을 거쳐 다시금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가회의는 부처님 입멸 후 지금까지 6번을 거쳐 왔습니다. 이 상가회의를 우리들은 부처님의 담마를 확립하기 위한 결집들('Dhamma Sangitis')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결집은 승가의 장로에 의해 암송되었고, 그 다음에 다시금 모든 참석 승려들의 합송이 뒤따라서, 그 암송된 것들이 정확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만장일치로 결집 대중 구성원에 의해 승인됐습니다.
제 1차 결집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상가가 분열될 위협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꼬삼비의 두 비구스님간의 다툼과 부처님의 사촌 데와닷따(devadatta)와의 대립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돌아간 후에 상가 분열의 위기나 담마의 그릇된 해석은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그룹 중의 하나인 수밧다(subhadda)라는 비구스님은 부처님이 완전하게 열반하신 것을 슬퍼하고 있던 비구스님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스승께서는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비구스님들은 부처님에게 더 이상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장 연장자인 마하깟사빠(Mahākassapa) 스님이 수밧다의 이 의견을 들었을 때,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담마는 쇠퇴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개의 piṭaka(Sutta와 Vinaya)를 편찬하려는 의도로 붓다의 입멸 7일후에 비구스님들에게 결집모임을 청했고, 결집할 장소와 시기, 기간, 그리고 참가 대중선별을 비구들의 동의를 얻어 결정했습니다. 이 첫 번째의 상가모임이 제1차 불교결집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결집의 동기가 진정한 담마의 쇠퇴 가능성에 대한 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마하깟사빠 스님은 부처님의 가사를 받은 유일한 제자일 뿐만 아니라, 가장 연장자 스님으로서의 권한으로 제1차 결집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두타행 수행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스승보다 더 새 가사를 입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과 옷을 교환했습니다. 후에 어쩌다 일어난 이 일이 권위 양도의 상징적 의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제1차 결집을 열게 된 동기가 수밧다 스님의 발언으로부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1차 결집에서 우빨리는 vinaya를, 아난다는 sutta를 암송할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우빨리가 율을 암송할 책임을 맡은 것은 이발사 출신이기에 부처님이 계를 줄때 출가할 사람의 머리를 깎는 임무를 행하면서 출가를 증명할 대중에 항상 포함되어 있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율을 완전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난다가 최초의 불교결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낭송하도록 선택되었던 것은 25년 동안 부처님을 시봉한 수행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그에게 시자를 요청하자 아난다는 어떤 조건만 허락되면 기꺼이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조건 중의 하나는 부처님이 성도 후 20년 동안 무슨 설법을 했던 그에게 다시 반복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던 아난다야말로 제1차 결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낭송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sutta)은 “Evaṁ me suttaṁ” 이라는 구절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내(아난다)가 들은 바로는”라는 뜻입니다.
제 1차 결집에 아난다가 경을 낭송하는 자로 뽑힌 것은 부처님의 주시봉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을 들어서 아는 최초의 연장자 스님이란 점을 모든 비구스님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뽑혔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살아계신 동안에는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 시봉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그는 부처님께 너무 인간적으로 가까웠을 것입니다. 마하깟사빠 존자가 아난다에게 아라한이 되라고 다그치자 그가 얼마나 빨리 아라한이 되었나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경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Suttas(Suttantika)나 vinayas를 계속 암기하는 다섯 명의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Dighabhāṇakā, Majjhimabhāṇakā, Saṁyuttabhāṇakā, Anguttarabhāṇakā 그리고 Vinayadhara가 그들입니다. Khuddakanikāya를 위한 전문가는 생략되었습니다.
Dighabhā ṇakā에 의하면 아난다는 걸어서 혼자 결집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Majjhimabhāṇakā에 따르면 땅 속으로 돌진하더니 결집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난다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묘사는 테라와다 구전에서도 아라한의 미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경우들이 Tripiṭaka에서 발견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그룹에서 아라한에 도달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비구니 스님은 초청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이미 아라한에 도달한 재가자들이 초청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uposatha(포살) 날에 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은 서로 따로 모여 pāṭimokkha(계본)을 독송하였습니다. 그것은 결집이 진행되는 동안이라도 출가자인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따로따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의식이기에 비구니 스님들이 초청되지 않은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Gahapati Saṁyutta에서 언급한 아라한을 이룬 재가 신도들 또한 있었지만, 포살이 진행될 동안에는 비록 아라한에 이른 재가자라 하더라도 그 의식에 참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후일 이런 재가자들에 대한 그릇된 대접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의지와 동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엔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상가라는 말은 bhikkhu, bhikkhuni, upāsaka, upāsika, 4그룹의 모든 불자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데 있어 그들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재가자들은 가정을 가진 사람들로서 스님들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뿐이라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 출가가 더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해석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선 출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오늘날의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조직인 상가를 만드신 목적을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도는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이라도 평등하게 참여하여,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담마 수행에 좀 더 편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처님은 인도 역사상 여자(비구니)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연장자 아라한 비구니라 할지라도 가장 나이 어린 비구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부처님께서는 이상적인 공동체인 상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직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상가 안에서는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생기면 스님들은 부처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길잡이로서 dhamma(법)와 vinaya(율)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결집에서 sutta와 vinaya의 다섯 가지 길잡이(보호자)가 생겼습니다.
Upāli는 vinaya의 보호자가 되었고,
Ānanda는 Dīgha-nikāya,
Sāriputta의 제자들은 Majjhima-nikāya,
Mahā kassapa는 Saṁyuṭṭa-nikāya,
Anuruddha는 Aṅguttara-nikāya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제자들은 sutta와 vinaya를 암기, 보존하는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을 모든 다른 nikāya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dīgha-nikāya의 34경, Majjhima-nikāya의 154경, Saṁyutta-nikāya의 대응 경들과 Aṅguttara-nikāya의 번호로 정리된 경들이 그것들니다.
부처님께서는 담마를 이해하는 그릇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방법으로 전함에도, 점진적 가르침(Ānupubbīkathā)이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에게 paṭiccasamuppāda(연기)에 대하여 설명할 때, 보시(dāna) 와 지계(sīla)를 함으로써 천상(sagga)에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dāna와 sīla는 원인을 가리키며, 반면 sagga는 그것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dānakathā, sīlakathā 그리고 saggakathā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그러나 매우 효과적으로 근본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제 1차 불교 결집의 성과는 sutta piṭaka와 vinaya piṭaka의 편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piṭaka인가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Dīgha-nikāya에 있는 유명한 경전인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의 끝부분에서 부처님의 시신은 다비 후에 여덟 부분(aṭṭhadoṇa)으로 나누어졌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에 대한 주석서에 의하면, 유골이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이 언급은 스리랑카에서 덧붙여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Dīgha-nikāya(장부경전)에 있는 대반열반경이 BC 3세기에 thera mahinda(마힌다 장로)에 의해서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전해 진 후에, 스리랑카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뒷부분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비구 스님들은 Mahā vihara(대사)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부분은 Mahā vihara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경전 끝에 덧붙여졌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대반열반경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해진 경전의 원래의 부분에 스리랑카에서 만든 추가분을 더한 것입니다.
다른 예로는, Buddhavaṁsa(불종성경)는 28장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석서는 26장까지 뿐입니다. 이것은 불종성경에 대한 주석서가 인도에서 써졌을 때까지는 불종성경도 27, 28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종성경을 바탕으로 그 주석서를 쓴 사람은 26장 이외에 27장, 28장의 주석서는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불종성경은 28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27장, 28장이 스리랑카에서 Mahā vihara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tripiṭaka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tripiṭaka와 똑 같은 것일 수는 없지만, 거의 대부분은 제1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던 그 tripiṭaka와 똑같다고도 이해해야 합니다.
제1차 결집에서 500명의 비구 스님들에 의해 Sutta와 Vinaya가 완성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오늘날 우리가 “Buddhavacana”(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들을 보존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세번째 모음집인 Abhidhamma는 제1차 결집에서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에 편찬되었습니다. BC 3세기 아소까왕 시절에 열린 제3차 불교결집에서 회의의 의장이 된 Moggaliputta-Tissa 비구 스님이 Abhidhamma piṭaka 7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Kathā vatthu (논사)라는 책을 썼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것으로 Abhidhamma piṭaka 7권은 불교 합송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제1차 결집의 말미에는 부수적으로 아난다의 5가지 과실에 대한 문책과 변론 및 참회가 행해지고 이를 대중들이 수용하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화합하지 못하는 찬나(Channa)에 대한 범단법(Brahmadaṇda)의 제재 조치가 결의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제 1차 결집이 모두 이루어지게 됩니다.
Vinaya piṭaka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제1차 결집은 부처님 열반 3개월 후에 열렸고, 그 결과 붓다의 Dhamma와 vinaya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집을 전후하여 비구스님들 사이에 대립과 이견이 있었습니다. 결집을 마친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는 Puraṇa라는 스님에게 그 결집에 만족하는지 물었습니다. 뿌라나 스님은 “나는 결집에서 편찬한 모음집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들은 담마 만을 따를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Puraṇa 장로의 불만에 관한 이야기는 제1차 결집 후에 스님들 사이의 불화에 관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결집 직후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후에 비구 스님들이 다른 종파로 분열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부처님의 담마는 포교의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60명의 제자들이 담마의 전파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을 때, 스님마다 각각의 장소에서 다른 조건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날씨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심지어는 인도 대륙은 거대해서 시간대까지 달랐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후에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227가지의 vinaya(계율)을 어느 하나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직면한 조건에 맞추어 사소한 계율들을 바꾸어야만 했던 스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하 깟사빠 존자는 vinaya의 어느 한 부분도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제1차 결집에서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1. 아빤냣떼 나 빤냐뻬땁베, 부처님께서 정하시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마라.
2. 빤냐떼 나 사뭇친디땁베,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마라.
3. 야타빤냣떼수 식카빠데수 식키땁베, 부처님께서 정하신 원칙을 하나도 변형시키지 마라
부처님 말씀의 합송이 붓다의 생존 중에 행해졌다면 붓다는 그것을 상기띠 숫따에서처럼 승인했겠지만, 붓다의 입멸 후이기 때문에 제일 결집이후 붓다의 말을 구두로 정확하고 확실하게 보존해야 할 책임이 아라한들에게 남겨졌습니다. 운집한 아라한들이 합의에 이르면 모두가 부처님 말씀을 합송으로 낭독해서 그것이 계승되어 지도록 기억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제1차 결집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억된 부처님 말씀은 결집 이후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제1차 결집의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합송 낭독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보존을 맡은 승려들이 기억해야 할 부분을 할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1차 결집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집(붓다의 말씀을 편성해서 합송 낭독하는 것)입니다. 이후의 결집은 이것을 확인하는 회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 후의 결집에서는 회의에 모인 승려들이 제1차 결집에서 모아진 스승의 말을 상처없이 개변하는 일 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서로 조사하기 위해서 소집된 회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1차 결집을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신 500명 아라한들의 참여로 이루어졌기에 Pancasatika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 역사적인 결집의 자세한 것은 Cullavagga Vinaya Pitaka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