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Paññāvaro 장로 스님
불교의 역사와 문화
1. 불교 개론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3. 제 1차 결집
4. 제 2차 결집
5. 제 3차 결집
6. 스리랑카에서 Mahinda 장로의 역할
7. BC 3세기~BC 1세기 스리랑카의 불교 발달사
8. 불교 경전의 문자화
9.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어 주석서 문헌의 중요성
10. 동남아시아의 불교 전파
11. 중앙아시아의 불교 전파
12. 각국의 불교 개론
1. 불교 개론
BC 6세기에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는 아소까 왕 시대인 BC 3세기부터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남쪽으로는 테라와다 불교가 스리랑카를 통해서 태국,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으로 퍼졌고, 서북쪽으로는 테라와다와 길을 달리한 대승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서 북인도, 티벳까지 전파된 후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불교는 길을 달리하여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불교를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부르고 있습니다. 소승불교라는 용어는 1956년 세계 불교도 회의에서 앞으로 일체 쓰지 않기로 결의된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스리랑카, 태국, 버마,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 전파된 불교를 지칭하는 데는 빨리어/남방/테라와다 불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히나야나(소승)불교라는 말은 적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테라와다의 지류,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종파를 지칭한 마하야나(대승) 학자들에 의해 창작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불교이기도 합니다. (cf. 설일체유부 종파는 시간에 대한 가르침을 놓고 논리적 대립을 하다 테라와다로부터 갈라졌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도가 현재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설일체유부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스리랑카의 불교와 스리랑카식 불교, 태국의 불교와 태국식 불교라고 부를 때 그것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스리랑카의 불교, 태국의 불교라는 말은 전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수행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편, 스리랑카식 불교, 태국식 불교는 불교의 문화적 관행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 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buddha)라는 말은 그 누구든 깨달음(아라한에 이른 사람)을 얻은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불교의 창시자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붓다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스리랑카의 불교와 태국의 불교, 버마의 불교가 다르지 않음은 이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식 불교는 태국식 불교와 다르고, 버마식 불교와도 다릅니다.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싯닷타(Pāli. Siddhaṭṭhā ; Skt. Siddhā rthā)는 BC 6세기 인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위해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는 것을 경시하는 인도 문화로 인하여, 우리는 부처님 탄생의 정확한 년도와 날짜를 모릅니다.
고따마 붓다의 입멸시기와 근본분열, 제2차 결집의 시기에 대한 대체적인 전승은 아래와 같습니다.
❇ 붓다의 입멸 시기
「B.C. 544~543년설」--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채용
국제 불교도 회의에서 불기 2500년(1956년)을 기점으로 동일하게 이 설을 채용함.
「B.C. 485년설」--분별설부
「B.C. 383년설」--설일체유부
❇ 근본 분열의 시기
「불멸 후 160년설」--테라와다
「불멸 후 100년 이후설」--분별설부
「불멸 후 116년 아소까왕시대설」--설일체유부
「불멸 후 200년 이전설」--대중부
❇ 제2차 결집의 시기
「불멸 후 100년설」--테라와다·분별설부·법장부(장아함의 전승)·화지부·설산부
「불멸 후 110년설」--설일체유부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된 내용이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진실한지 아닌지 입니다. 반대로 중국인들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간과 날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 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 역사적 확실성은 많은 기념비를 남긴 아소까 왕의 경우에서는 확실합니다(그래서 부처님의 탄생, 성도, 입멸연대를 잡는 기준으로 아소까왕의 통치시기를 기준점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대 인도 역사에는 그다지 증거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빨리 경전에 나오는 자료들조차도 역사와의 일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본생담(Jātaka) 이야기 중의 하나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마라(Māra)가 말하길, 싯닷타 왕자를 7년 동안 뒤따랐지만 그를 공격할 꼬투리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7년이란 언급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왕자의 6년 고행과 다릅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 교리에 나오는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그 해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모순된 해석에 테라와다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인,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가 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를 편찬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빨리 삼장 외에 또 다른 중요한 테라와다 문헌은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스님이 주고받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질문과 답변인 밀린다빤하(Milindapaṇha, 밀린다왕문경)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사회개혁가였을까요? BC 6세기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생각해 보면 인간평등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부처님의 여성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부처님의 여성에 대한 접근은 대담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과연 정법의 쇠퇴가 여성 출가자에게 책임이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경계를 제정했고 그것을 정법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빨리어 『장부』의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상가가 자주 많이 모이고, 모여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제정된 것을 따르고, 법랍이 많은 수행자를 존경하고, 일어난 갈애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청정한 범행자를 오게 하고 온 범행자를 편안하게 하는 한에서 상가가 성장하고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가의 쇠퇴는 여성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상가가 멸망하지 않게 하는 7가지 불퇴법을 잘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빨리어 『율장』의 주석서인『선견율비바사』에 따르면 아소까왕의 아들 마힌다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날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영향을 받은 마힌다의 여동생인 상가미타도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마힌다 장로와 함께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보리수를 가지고 비구니 교단을 이끌고 건너갑니다. 마침내 인도 밖에서 처음으로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구니 교단이 스리랑카에서 안정됩니다. 약 600년 후, 즉 429년과 433년의 두 차례에 걸쳐 비구니 상가는 수백 명의 중국 여승에게 비구니계를 주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고 중국여성은 구족계를 받아 비구니가 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비구니 수의 증가와 비구니 교단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법장부(Dharmagupta)율을 따르는 중국의 비구니상가는 4차례의 법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습니다.
북방에서는 비구니 교단이 대부분 존속되어 왔지만, 남방 비구니의 교단은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대부분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멸된 이유는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파괴 그리고 사회적 혼란 등으로 교단이 사라지고 난 후에 비구들은 즉시 다른 나라에 가서 상가를 구성하여 돌아오거나 다른 나라의 10명 이상의 비구들이 와서 교단을 형성하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비구 상가는 쉽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구니상가는 비구 상가가 반드시 동참해야 비구니 상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강도 등의 위험과 이국으로의 여행길의 험난함 때문에 교단형성을 위해 다른 나라로 가거나, 다른 나라의 비구니가 그 나라에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비구니 교단만이 소멸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시대의 사회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상가였습니다. 부처님은 그 스스로 위대한 사회개혁가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불교를 점검하는 것은 불교의 역사를 쫓는데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보리(bodhi) 혹은 삼보리(sambodhi)라는 말은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부처님을 포함한 아라한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단계 도달과 다른 아라한들의 그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正自覺者(Sammāsambuddha,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라는 다른 말을 만들어 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부처님을 신의 위치 혹은 그 이상의 위치로 올려놓기 위해 신중의 신(devādeva)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문장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에 대한 이런 신격화 내지 미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알다시피 부처님께서 법을 처음 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0명의 아라한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담마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포교적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담마를 배우고 올바르게 수행하여 부처님을 뵙지 않고도 아라한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부처님이 누구인지 계속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제자들은 자연히 부처님의 신격화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탑 신앙은 부처님의 신격화의 연장선에서 발달되었습니다. 탑 신앙에는 4개의 존경받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Sammā-sambuddha(정자각자), Pacceka Buddha(벽지불, 깨달음은 이루었지만 아직 담마를 설할 수는 없는 성자들), 그리고 Arahant(아라한)과 Cakkavatti(전륜성왕)으로 훌륭한 도덕심과 지성, 그리고 더 높은 정신세계를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지막만이 재가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출가자들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탑 신앙의 수행은 재가자들 (Upāsaka와 Uāsika) 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탑을 세우고 유지하고 숭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출가 제자들에게 하신 이 권유는 재가자들이 탑 신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가 신도들이 어느 방향에서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사거리에 탑을 세웠습니다. 참배할 때 그들은 어떤 경들(Sutra, Suttas)을 낭송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재가자들 또한, 출가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편찬되지 않은 부처님 말씀을 모았습니다. Buddhavaṁsa(불종성경), Lalitavistara(방광대장엄경, 보요경), Buddhacarita(불소행찬) 그리고 Mahāvastu(대사)같은 불교 경전들에는 재가자들에 의해 수집된 부처님의 일생 이야기를 묘사하는 자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담마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84,000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이 숫자에 따라 아소까 왕은 인도의 전역에 84,000 탑을 건립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동안 어디에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유명한 문장 “evaṁ me sutaṁ...” 으로 시작되는 경전을 통해서 25년 동안의 설법장소 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어느 장소인지가 언급된 후에, 무슨 법을 설하셨고, 그리고 그것이 몇 년이었는지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범천 사함빠띠(Sahampati)가 부처님께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paṭiccasamuppāda(연기법)에 대해 말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원인이 없으면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과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후에 이 진리를 놓고 며칠이고 몇 주고(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음) 거듭 숙고하셨습니다. 걸어서 약 250km거리인 베나레스(바라나시)로 향하는 길에 부처님은 그의 이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최초의 설법 Dhammacakka pavattana Sutta(초전법륜경)를 5명의 제자들에게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묘사하듯이 어느 누구에게든지 차별 없이 법을 설하시면서 80평생을 사셨습니다. 고향을 향한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은 대반열반경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치고 병들어 아난다에게 물과 다른 것들을 청하면서 힘들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이 묘사는 부처님조차도 육체적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위장병이 있으셨는데 마지막 드신 음식이 위장의 상태에 맞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음식이 돼지고기였든 버섯이었든 관계없이 불교의 초기 경전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의미는 부처님은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점점 더 부처님을 신격화하려 했고 부처님 생애의 작은 부분까지도 미화하려 했습니다.
45년 설법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비구니 상가를 허락했을 때, 상가에선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 외의 일에서도 비구 상가 안에서조차 어떤 이들은 부처님을 탐탁해 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부처님의 사촌인 데와닷따(devadatta)가 있는데 그는 부처님을 거스르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띠(Sāti)라는 비구 스님이 재생(punabbhava)에 대해 부처님께 도전적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서, 그는 의식(Viññaṇa)이 이전의 생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다른 생으로 가지고 간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는 나의 가르침을 망치고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상가도 부처님을 거슬러기도 하고, 담마도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앎을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세 종류의 앎(tevijjā; 삼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pubbenivāsānussatiñāṇa(숙명통)는 전생의 기억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dibba-cakkhu(천안통)는 현재의 존재를 결정짓는 특별한 업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āsavāna-khayeñāṇa(누진통)는 모든 편견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모든 번뇌를 부수는 앎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앎이 명상을 통해서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반해 마지막 것은 오직 아라한에게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Tripiṭaka(삼장)
알다시피 경전은 삼장(Tipiṭaka : Vinaya Piṭaka, Sutta Piṭaka, Abhidhamma Piṭaka)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Vinaya Piṭaka(율장)에는 Sutta-vibhaṅga(경분별), Khandhaka(건도부), Parivāra(부수)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Sutta Piṭaka(경장)에는 다섯 개의 모음집(Nikāya, 부)이 있습니다.
Dīgha-nikāya(장부) : 비교적 긴 34경전의 모음집
Majjhima-nikāya(중부) : 크기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152경전들.
Samyutta-nikāya(상응부) : 길이에 대한 고려 없이 상응하는 것들을 함께 묶은 경전들.
Aṅguttara-nikāya(증지부) : 1부터 11까지의 순번에 따라 정리된 경전들.
khuddaka-nikāya(소부) : 크기에 있어 가장 짧은 경전들. 이것은 Sutta nipāta(경집), Dhammapada(법구경), Theragāthā(장로게송); 그리고 Therigāthā(장로니게송), Jataka(본생경), Buddhavaṁsa(불종성경), Cariyāpiṭaka(소행장), Apadāna(비유경) 같은 경전들을 포함합니다. 스리랑카에는 15개, 태국에는 17개, 버마에는 18개의 경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Nettippakaraṇa(도론), Peṭakopadesa(장훈), Milindapanha(밀린다왕문경)같은 경전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 Abhidhamma Piṭaka(논장)에는 Dhamma-saṅgaṇi(법집론), Vibhaṅga(분별론), Dhātu-kathā(계설론), Puggala-paññatti(인시설론), Kathāvatthu(논사), Yamaka(쌍론), Paṭṭhāna(발취론)의 7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장부분은 테라와다에서 빨리어로 완전하게 보존해 온 남전문헌인 5니까야(부)와 달리 북전문헌인 4아가마(아함)는 복수의 여러 부파 것들을 모은 것입니다.
남·북전 많은 부분이 함께 대응 관계는 있지만, 상당부분은 대응하지 않습니다.
율장부분은 빨리율장이 한 종류, 한역율장이 다섯 종류, 티벳율장이 한 종류가 있습니다.
논장부분은 테라와다 빨리논장의 7론, 설일체유부의 7론, 법장부의 1서가 현존합니다.
이런 경전들의 시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언제 누가 그것을 편찬했을까? 이런 의문은 우리에게 제 1차 불교결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가르침은 BC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문자화된 성문 경전이 나타날 때까지 제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그런 구전의 시작은 부처님 생존 시부터 있었지만, 체계적인 구전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3개월 후에 열린 제 1차 결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글쓴이 : Paññāvaro 장로 스님
불교의 역사와 문화
1. 불교 개론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3. 제 1차 결집
4. 제 2차 결집
5. 제 3차 결집
6. 스리랑카에서 Mahinda 장로의 역할
7. BC 3세기~BC 1세기 스리랑카의 불교 발달사
8. 불교 경전의 문자화
9.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어 주석서 문헌의 중요성
10. 동남아시아의 불교 전파
11. 중앙아시아의 불교 전파
12. 각국의 불교 개론
1. 불교 개론
BC 6세기에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는 아소까 왕 시대인 BC 3세기부터 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남쪽으로는 테라와다 불교가 스리랑카를 통해서 태국,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으로 퍼졌고, 서북쪽으로는 테라와다와 길을 달리한 대승불교가 실크로드를 통해서 북인도, 티벳까지 전파된 후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불교는 길을 달리하여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불교를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부르고 있습니다. 소승불교라는 용어는 1956년 세계 불교도 회의에서 앞으로 일체 쓰지 않기로 결의된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스리랑카, 태국, 버마,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 전파된 불교를 지칭하는 데는 빨리어/남방/테라와다 불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히나야나(소승)불교라는 말은 적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테라와다의 지류,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종파를 지칭한 마하야나(대승) 학자들에 의해 창작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불교이기도 합니다. (cf. 설일체유부 종파는 시간에 대한 가르침을 놓고 논리적 대립을 하다 테라와다로부터 갈라졌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도가 현재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설일체유부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스리랑카의 불교와 스리랑카식 불교, 태국의 불교와 태국식 불교라고 부를 때 그것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스리랑카의 불교, 태국의 불교라는 말은 전 세계 어디서나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수행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편, 스리랑카식 불교, 태국식 불교는 불교의 문화적 관행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 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buddha)라는 말은 그 누구든 깨달음(아라한에 이른 사람)을 얻은 사람을 가리키는 동시에, 불교의 창시자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붓다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스리랑카의 불교와 태국의 불교, 버마의 불교가 다르지 않음은 이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식 불교는 태국식 불교와 다르고, 버마식 불교와도 다릅니다.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싯닷타(Pāli. Siddhaṭṭhā ; Skt. Siddhā rthā)는 BC 6세기 인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위해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는 것을 경시하는 인도 문화로 인하여, 우리는 부처님 탄생의 정확한 년도와 날짜를 모릅니다.
고따마 붓다의 입멸시기와 근본분열, 제2차 결집의 시기에 대한 대체적인 전승은 아래와 같습니다.
❇ 붓다의 입멸 시기
「B.C. 544~543년설」--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채용
국제 불교도 회의에서 불기 2500년(1956년)을 기점으로 동일하게 이 설을 채용함.
「B.C. 485년설」--분별설부
「B.C. 383년설」--설일체유부
❇ 근본 분열의 시기
「불멸 후 160년설」--테라와다
「불멸 후 100년 이후설」--분별설부
「불멸 후 116년 아소까왕시대설」--설일체유부
「불멸 후 200년 이전설」--대중부
❇ 제2차 결집의 시기
「불멸 후 100년설」--테라와다·분별설부·법장부(장아함의 전승)·화지부·설산부
「불멸 후 110년설」--설일체유부
인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된 내용이 인간의 경험에 비추어 진실한지 아닌지 입니다. 반대로 중국인들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간과 날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 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 역사적 확실성은 많은 기념비를 남긴 아소까 왕의 경우에서는 확실합니다(그래서 부처님의 탄생, 성도, 입멸연대를 잡는 기준으로 아소까왕의 통치시기를 기준점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대 인도 역사에는 그다지 증거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빨리 경전에 나오는 자료들조차도 역사와의 일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본생담(Jātaka) 이야기 중의 하나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마라(Māra)가 말하길, 싯닷타 왕자를 7년 동안 뒤따랐지만 그를 공격할 꼬투리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7년이란 언급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왕자의 6년 고행과 다릅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 교리에 나오는 내용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그 해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모순된 해석에 테라와다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인, 목갈리뿟따 띳사(Moggaliputta Tissa) 장로가 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를 편찬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빨리 삼장 외에 또 다른 중요한 테라와다 문헌은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스님이 주고받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질문과 답변인 밀린다빤하(Milindapaṇha, 밀린다왕문경)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사회개혁가였을까요? BC 6세기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생각해 보면 인간평등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부처님의 여성의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족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부처님의 여성에 대한 접근은 대담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과연 정법의 쇠퇴가 여성 출가자에게 책임이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팔경계를 제정했고 그것을 정법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빨리어 『장부』의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상가가 자주 많이 모이고, 모여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제정된 것을 따르고, 법랍이 많은 수행자를 존경하고, 일어난 갈애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고, 청정한 범행자를 오게 하고 온 범행자를 편안하게 하는 한에서 상가가 성장하고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가의 쇠퇴는 여성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상가가 멸망하지 않게 하는 7가지 불퇴법을 잘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빨리어 『율장』의 주석서인『선견율비바사』에 따르면 아소까왕의 아들 마힌다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는 날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영향을 받은 마힌다의 여동생인 상가미타도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마힌다 장로와 함께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보리수를 가지고 비구니 교단을 이끌고 건너갑니다. 마침내 인도 밖에서 처음으로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구니 교단이 스리랑카에서 안정됩니다. 약 600년 후, 즉 429년과 433년의 두 차례에 걸쳐 비구니 상가는 수백 명의 중국 여승에게 비구니계를 주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도 비구니 교단이 형성되고 중국여성은 구족계를 받아 비구니가 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비구니 수의 증가와 비구니 교단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법장부(Dharmagupta)율을 따르는 중국의 비구니상가는 4차례의 법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습니다.
북방에서는 비구니 교단이 대부분 존속되어 왔지만, 남방 비구니의 교단은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대부분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그 소멸된 이유는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파괴 그리고 사회적 혼란 등으로 교단이 사라지고 난 후에 비구들은 즉시 다른 나라에 가서 상가를 구성하여 돌아오거나 다른 나라의 10명 이상의 비구들이 와서 교단을 형성하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비구 상가는 쉽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구니상가는 비구 상가가 반드시 동참해야 비구니 상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강도 등의 위험과 이국으로의 여행길의 험난함 때문에 교단형성을 위해 다른 나라로 가거나, 다른 나라의 비구니가 그 나라에 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비구니 교단만이 소멸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시대의 사회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상가였습니다. 부처님은 그 스스로 위대한 사회개혁가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불교를 점검하는 것은 불교의 역사를 쫓는데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보리(bodhi) 혹은 삼보리(sambodhi)라는 말은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부처님을 포함한 아라한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단계 도달과 다른 아라한들의 그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正自覺者(Sammāsambuddha,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라는 다른 말을 만들어 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부처님을 신의 위치 혹은 그 이상의 위치로 올려놓기 위해 신중의 신(devādeva)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문장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부처님에 대한 이런 신격화 내지 미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알다시피 부처님께서 법을 처음 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0명의 아라한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담마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불교는 처음부터 포교적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담마를 배우고 올바르게 수행하여 부처님을 뵙지 않고도 아라한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부처님이 누구인지 계속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면서 제자들은 자연히 부처님의 신격화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탑 신앙은 부처님의 신격화의 연장선에서 발달되었습니다. 탑 신앙에는 4개의 존경받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Sammā-sambuddha(정자각자), Pacceka Buddha(벽지불, 깨달음은 이루었지만 아직 담마를 설할 수는 없는 성자들), 그리고 Arahant(아라한)과 Cakkavatti(전륜성왕)으로 훌륭한 도덕심과 지성, 그리고 더 높은 정신세계를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지막만이 재가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출가자들이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탑 신앙의 수행은 재가자들 (Upāsaka와 Uāsika) 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탑을 세우고 유지하고 숭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Mahāparinibbāna Sutta(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출가 제자들에게 하신 이 권유는 재가자들이 탑 신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가 신도들이 어느 방향에서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사거리에 탑을 세웠습니다. 참배할 때 그들은 어떤 경들(Sutra, Suttas)을 낭송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재가자들 또한, 출가자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편찬되지 않은 부처님 말씀을 모았습니다. Buddhavaṁsa(불종성경), Lalitavistara(방광대장엄경, 보요경), Buddhacarita(불소행찬) 그리고 Mahāvastu(대사)같은 불교 경전들에는 재가자들에 의해 수집된 부처님의 일생 이야기를 묘사하는 자료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담마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84,000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이 숫자에 따라 아소까 왕은 인도의 전역에 84,000 탑을 건립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동안 어디에 머물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유명한 문장 “evaṁ me sutaṁ...” 으로 시작되는 경전을 통해서 25년 동안의 설법장소 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어느 장소인지가 언급된 후에, 무슨 법을 설하셨고, 그리고 그것이 몇 년이었는지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범천 사함빠띠(Sahampati)가 부처님께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paṭiccasamuppāda(연기법)에 대해 말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원인이 없으면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과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후에 이 진리를 놓고 며칠이고 몇 주고(경전에 따라 차이가 있음) 거듭 숙고하셨습니다. 걸어서 약 250km거리인 베나레스(바라나시)로 향하는 길에 부처님은 그의 이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최초의 설법 Dhammacakka pavattana Sutta(초전법륜경)를 5명의 제자들에게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묘사하듯이 어느 누구에게든지 차별 없이 법을 설하시면서 80평생을 사셨습니다. 고향을 향한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은 대반열반경에서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치고 병들어 아난다에게 물과 다른 것들을 청하면서 힘들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이 묘사는 부처님조차도 육체적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위장병이 있으셨는데 마지막 드신 음식이 위장의 상태에 맞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음식이 돼지고기였든 버섯이었든 관계없이 불교의 초기 경전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의 중요한 의미는 부처님은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점점 더 부처님을 신격화하려 했고 부처님 생애의 작은 부분까지도 미화하려 했습니다.
45년 설법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비구니 상가를 허락했을 때, 상가에선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 외의 일에서도 비구 상가 안에서조차 어떤 이들은 부처님을 탐탁해 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부처님의 사촌인 데와닷따(devadatta)가 있는데 그는 부처님을 거스르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띠(Sāti)라는 비구 스님이 재생(punabbhava)에 대해 부처님께 도전적으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서, 그는 의식(Viññaṇa)이 이전의 생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다른 생으로 가지고 간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는 나의 가르침을 망치고 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상가도 부처님을 거슬러기도 하고, 담마도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바른 앎을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에 따르면 세 종류의 앎(tevijjā; 삼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pubbenivāsānussatiñāṇa(숙명통)는 전생의 기억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dibba-cakkhu(천안통)는 현재의 존재를 결정짓는 특별한 업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āsavāna-khayeñāṇa(누진통)는 모든 편견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모든 번뇌를 부수는 앎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앎이 명상을 통해서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반해 마지막 것은 오직 아라한에게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Tripiṭaka(삼장)
알다시피 경전은 삼장(Tipiṭaka : Vinaya Piṭaka, Sutta Piṭaka, Abhidhamma Piṭaka)이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Vinaya Piṭaka(율장)에는 Sutta-vibhaṅga(경분별), Khandhaka(건도부), Parivāra(부수)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Sutta Piṭaka(경장)에는 다섯 개의 모음집(Nikāya, 부)이 있습니다.
Dīgha-nikāya(장부) : 비교적 긴 34경전의 모음집
Majjhima-nikāya(중부) : 크기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152경전들.
Samyutta-nikāya(상응부) : 길이에 대한 고려 없이 상응하는 것들을 함께 묶은 경전들.
Aṅguttara-nikāya(증지부) : 1부터 11까지의 순번에 따라 정리된 경전들.
khuddaka-nikāya(소부) : 크기에 있어 가장 짧은 경전들. 이것은 Sutta nipāta(경집), Dhammapada(법구경), Theragāthā(장로게송); 그리고 Therigāthā(장로니게송), Jataka(본생경), Buddhavaṁsa(불종성경), Cariyāpiṭaka(소행장), Apadāna(비유경) 같은 경전들을 포함합니다. 스리랑카에는 15개, 태국에는 17개, 버마에는 18개의 경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Nettippakaraṇa(도론), Peṭakopadesa(장훈), Milindapanha(밀린다왕문경)같은 경전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 Abhidhamma Piṭaka(논장)에는 Dhamma-saṅgaṇi(법집론), Vibhaṅga(분별론), Dhātu-kathā(계설론), Puggala-paññatti(인시설론), Kathāvatthu(논사), Yamaka(쌍론), Paṭṭhāna(발취론)의 7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장부분은 테라와다에서 빨리어로 완전하게 보존해 온 남전문헌인 5니까야(부)와 달리 북전문헌인 4아가마(아함)는 복수의 여러 부파 것들을 모은 것입니다.
남·북전 많은 부분이 함께 대응 관계는 있지만, 상당부분은 대응하지 않습니다.
율장부분은 빨리율장이 한 종류, 한역율장이 다섯 종류, 티벳율장이 한 종류가 있습니다.
논장부분은 테라와다 빨리논장의 7론, 설일체유부의 7론, 법장부의 1서가 현존합니다.
이런 경전들의 시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언제 누가 그것을 편찬했을까? 이런 의문은 우리에게 제 1차 불교결집을 떠올리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가르침은 BC 1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문자화된 성문 경전이 나타날 때까지 제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그런 구전의 시작은 부처님 생존 시부터 있었지만, 체계적인 구전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3개월 후에 열린 제 1차 결집으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