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계율(戒律)은 열반의 주춧돌(마지막회)/빤냐완따 이사장 스님

Mahanama
2021-05-05
조회수 808

                                                                                                     [계율(戒律)은 열반의 주춧돌]

 

 9. 어느 스님의 참회문

 

‘경천동지(驚天動地)’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빨리어 경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실 때 일천세계가 흔들리고 요동치고 강하게 진동했으며, 마지막 대열반에 드신 직후에도 대열반과 함께 두려움과 공포의 전율을 일으키는 큰 지진이 있었으며 천둥번개가 내리쳤노라”

 

세상을 살다보면 이따금씩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들이 언론을 통해 발표되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합니다. 특히 만민의 사표가 되어야 할 종교인·정치인을 비롯한 교육계·법조계 등의 유명인사가 이권개입이나 특혜문제로 공분을 사기도 하고, 상습적인 성추행이나 폭행 등의 성범죄를 저질러 충격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명백한 범죄 행위(불교인인 경우에는 중대한 범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 승은 지금까지 자신의 범죄행위(범계행위)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스스로 죄값을 달게 받겠다거나, 혹은 피해 당사자나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고 깊이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절대로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등 온갖 궁색한 변명으로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합니다.

 

탐욕과 성냄, 욕망과 분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성자가 아닌 이상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채 그 욕구충족을 위해 잘못을 일삼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폐륜까지 저지르기도 합니다. 종교인·정치인을 비롯한 각계의 인사들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경천동지할 범법(범계)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그분들도 탐진치 3독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키우던 강아지가 길 가는 사람을 물었다하여 그 강아지에게 반성과 참회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이성과 양심이라는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고, 속죄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디엔가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경천동지할 사건이 언론매체를 통해 밝혀질 때마다 피해자는 지금 분명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가해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요? 가해나 범법을 스스로 인정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비는 모습이 왜 이 승의 기억 속에는 전혀 없는 것일까요?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감추고 부정하면서 위기상황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나 부를 한 순간에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최고의 지성과 도덕적 소양을 가진 분들의 그와 같은 일탈행위에 대해서 엄히 꾸짖고 있으며, 그분들의 범법(범계) 사실에 대한 명백한 인정과 진심어린 속죄에 대한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습니다. 범법(범계) 이후 당연히 행해져야 할 그와 같은 최소한의 도리가 이제는 도과(道果)의 성취를 기대하는 것보다 정녕 더 어려운 것일까요? ‘인간의 속성은 본래 이런 것이다’라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얼마 전에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실로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피해 당사자와 주위 분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뼛속 깊이 스스로를 뉘우치며 남은 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재가자가 되어 세상에 봉사하면서 살아가겠노라 공포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한때 많은 불자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았으며, 장차 한국불교에 큰 자취를 남길 스님으로 기대되던 외국국적의 스님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4가지 중요한 계율을 제정해 주셨는데, 그 계율조항을 <4빠라지카>라고 합니다. <4빠라지카>는 <재가자 5계>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재가자 5계>보다는 보다 차원 높은 지계수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스님은 <4빠라지카> 중의 하나를 범한 것입니다.

 

비구가 지켜야 할 227계목(빠띠목카) 가운데 <4빠라지카>는 가장 중요한 계목으로서 만일 이 계율을 범하게 되면, 범하는 순간 비구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러한 죄들은 누구에 의해서도 치유될 수 없고, 참회할 수 없으며, 결국 승단으로부터 추방됩니다. 그는 이 생에서 두 번 다시 비구가 될 수 없으며 이것은 비구로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율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4빠라지카>의 범계를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사람의 목이 잘려서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듯이,

시든 잎이 가지에서 떨어지듯이

큰 바위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듯이,

야자열매가 익어서 땅바닥에 떨어지듯이

 

부처님께서 이토록 엄중히 경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님은 범계를 하였고, 한 동안 자신의 범계 사실을 숨긴 채 살아오다가 결국 타의에 의해 그 범계 사실이 공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쯤 되면 세상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합니까? 대개의 경우 일단은 잠적해 버립니다. 피해자를 회유하거나 겁박합니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자신의 유책사유를 피해자에게 전가하면서 법적 대응을 준비합니다. 매스컴을 통해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처신 방식을 무수히 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님의 처신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처신이었습니다. 참회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 스님의 참회문은 얼마 후 이 승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순간, 같은 비구로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한때 법담을 나누었던 도반으로서 한없이 야속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를 부정하지 않고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하염없는 눈물로써 사죄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부끄러움과 후회와 죄스러움이었습니다. 엎드려 사죄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절망과 함께 작은 희망의 불빛을 보았습니다.

  

저의 잘못을 엎드려 참회 드립니다.

저는 지금 재가자로서 말씀 올립니다.

저의 범계로 인해 상처받으신 불자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하루 빨리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거듭거듭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교단의 많은 출가 스님들에게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엎드려 사죄를 드립니다.

잘못 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재가자로 평생을 참회하면서 살겠습니다.

한국말이 서툴러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이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

다시 한번 불자님들께 저의 잘못을

엎드려 참회 드립니다.

다시는 이와 같은 부끄러운 일이

이 땅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염원합니다.

그동안 저를 아껴주신 모든 불자님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거듭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

 경천동지할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절대로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혹은 ‘법적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라고 일관하는 이 변명의 시대에 A4용지 한 쪽 분량의 이 참회문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무후무한, 어쩌면 불교역사에 길이 남을 참회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한 장의 참회문은 그저 부끄럽기 짝이 없는 고백일 뿐인데 역사에 길이 남을 참회문이라니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정과 반성, 부끄러워함과 속죄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반성하는 것을 불교용어로 ‘참회(懺悔)’라고 합니다. 빨리어로는 <데사나(desanā)> 혹은 <아빳띠 데-사나(āpatti desanā)>라고 합니다. 본래 <데사나>는 ‘고백하다’, <아빳띠 데사나>는 ‘범계를 고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둘 다 참회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참회(懺悔)라는 단어와 함께 종종 등장하는 불교용어가 ‘참괴(慙愧)’입니다. 부끄러워할 참(慙)과 두려워할 괴(愧)의 합성어입니다. 빨리어로 'hiri-bhaya' 혹은 'hiri-ottappa'라고 합니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수행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가 저지르지 못 할 악행이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hiri)은 악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이 됩니다. 두려움(bhaya)이란 단어는 『앙굿따라 니까야』 곳곳에 나옵니다. 경에서는 ‘두려움’을 4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자책의 두려움(attavādānu-bhaya)

2.타인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paravādānu-bhaya)

3.징벌에 대한 두려움(daņda-bhaya)

4.내세의 과보에 대한 두려움(duggati-bhaya)

 

만일 이와 같은 두려움이 없다면 누구나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게 될 것이고, 모든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상의 4가지 근본 두려움 이외에 통찰지의 성숙과정에 나타나는 ‘두려움(bhaya)’이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bhaya-ñāna' 즉 ’두려움의 지혜‘라고 합니다. 이 통찰지는 오온현상, 즉 일체의 물리적·정신적 현상을 무상·고·무아로 통찰했을 때 나타나는 ‘두려움’입니다. 이때의 두려움 인식은 수행자로 하여금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출가를 '넥캄마(nekkhamma)'라고 합니다.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떠났다는 뜻입니다.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두른다 하여 모두 출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나 재가자들의 안락한 삶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온통 감각적 요소들로 넘쳐납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과의 접촉(노출)을 가능한 적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늘 지계의 중요성을 상기하면서 범계했을 때의 부끄러움과 범계의 과보에 대한 두려움을 자주 숙고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빠라지카 계율을 상습적으로 범하고서도 일말의 가책도 없이 버젓하게 가사를 입고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그 어떤 파렴치한도 자기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귀신은 속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은 결코 속일 수 없는 법입니다. 범계행위가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피해자에게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범계를 공동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이와 같은 사실을 계속 주위에 유포시킨다면 명예훼손과 관련한 법적조치를 불사하겠다고 피해자를 겁박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참회문을 발표했던 외국인 스님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 아닙니까?

 

이 승이 이토록 귀한 법문공간을 할애해가며 이와 같은 극단적인 실예를 들어 보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현대문명 속에서 지계를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가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출가자가 재가자를 상대로 하여 범계를 행하였다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책임은 출가자에게 있습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만인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재가불자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스승인 동시에 복을 지을 수 있는 복밭이 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만일 상대가 평정심을 잃었다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바르게 이끌어야 합니다.

 

출가자 중에는 삼보에 대한 돈독한 신심을 바탕으로 청정한 계행을 실천하면서 생사해탈의 바른 길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세속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쉽게 감각적 대상에 현혹되어 살아가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그 어떤 대상 앞에서도 현혹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상대를 바르게 이끌 수 있는 반면, 후자의 수행자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를 현혹시키거나 혹은 상대의 현혹에 쉽게 빠져듭니다. 이런 수행자는 평소 계율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지계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해 놓지 않으면 십중팔구 사고를 치거나 환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승 출가한 이래 그와 같은 사례들을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은 오래 전부터 불가에서 전해져오고 있는 불문율입니다. 꺽인 꽃은 금새 시들지만 꺼지 않고 그냥 두면 오래도록 향기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꽃 진 뒤에 씨앗이 떨어져 그 이듬해 또다시 향기로운 꽃을 피워냅니다. 최근 도반스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자들에게 교훈이 될까하여 들려드립니다. 도반스님은 자신의 생일을 본인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젊은 보살님이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와 스님 생신 축하드린다며 케익크에 촛불을 켜놓고는 공손히 절을 올린 뒤 흰 봉투 하나를 놓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도반스님은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원칙을 상기하며 이성적으로 대처했다고 합니다. 보살님이 떠난 뒤 봉투를 열어보았답니다. 그 봉투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그것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 근래엔 어떤 보살님으로부터 전화나 문자가 종종 왔었답니다. 주로 낮에 왔지만 가끔은 밤에도 왔었답니다. 처음엔 무시할 수가 없어 예의상 잘 받아 주었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대로 받지 않는 답니다. 귀찮아서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보살님을 위해서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태국·미얀마·스리랑카의 경우에는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들에게도 계율 학습을 철저히 시킵니다. 5계뿐만이 아니라 비구 227계 중에서 재가자와 관련된 계목을 공부함으로서 출가수행자들이 재가자들을 접할 때 계율을 바르게 준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처럼 출가자는 재가자를 바르게 이끌고, 재가자는 출가자가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불교공통체를 더욱 건강하게 유지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엎질러진 물이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계를 범하였다면 그것은 이 엎질러진 물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을 되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참회(懺悔)입니다. 참회(懺悔)야말로 엎질러진 물을 되 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참회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4빠라지카>를 제외한 모든 범계행위는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범계사실을 상가대중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다시는 계를 어기지 않겠다는 상가와의 약속이요, 자신을 향한 다짐입니다. 특히 비구들의 범계에 대한 참회는 <비구포살> 때 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포살을 통해 참회가 받아들여지면 지난 범계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잘못을 묻지 않습니다. 이를 출죄(出罪)라고 합니다.

 

참회는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이제 더 이상 악업 짓지 않고 선업 공덕 쌓으면서 열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통로입니다. 시대의 살인마 앙굴리말라도 참회를 통해 아라한 성자로 거듭날 수 있었고, 기원 전 3세기 무렵 최초로 인도 대륙을 통일했던 아쇼카 대왕 역시 가장 치열했던 칼링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그 무수한 살생의 현장을 되돌아보며 다시는 살생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였고, 그 다짐의 증표로서 인도대륙 곳곳에 담마칙령을 새겨서 그 누구도 살생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재정해 놓았습니다. 이후 아쇼카 대왕은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도와 제3차 불교경전결집을 성공리에 마치는 등 불교역사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이 모두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참회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은 불자가 됩시다. 지금까지 지은 온갖 허물 삼보 전에 참회하면서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절대로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등 궁색한 변명 따위로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면서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용기 있는 불자가 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아래의 글은 재가불자가 스님께 참회를 구할 때의 게송입니다)

 

<재가대중>

Mahāthere

pamādena dvārattayena

kataṁ sabbaṁ aparādhaṁ

khamathu no bhante.

마하-테레-

빠마-데-나 드와-랏따예-나

까땅 삽방 아빠-랏당

카마투 노- 반떼-.

(존경하는 스님, 저희들이

다른 이에게 조심성 없이

마음과 말과 몸으로 행한

모든 나쁜 일들을 참회합니다)

 

<장로스님>

Ahaṁ khamāmi,

tumhehipi me khamitabbaṁ.

아항 카마-미

뚬헤-히삐 메- 카미땁방

(저는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스님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재가대중>

Kamāma bhante.

까마-마 반떼-

(존경하는 스님,

저희들도 스님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

 

《이상으로 [계율은 열반의 주춧돌] 법문연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거친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난 1월 초, 교단밴드 관리자님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거의 의무적으로 법문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어느덧 넉 달이 되었습니다.

법문의 주제가 정해지면 그에 따른 경전적 근거를 찾아 정리·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스스로를 점검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는 교단 소속 스님들의 다양한 법문글이 게재될 수 있도록 의논하겠습니다. 

사실 교단 스님의 법문은 매우 귀한 편이니 녹취든 영상이든 글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확보 되는대로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직접 올려주시거나 <마하나마 고문>님 또는 <꾸살리 총무>님을 통해 올리셔도 될 듯.

 며칠 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자님들께 <계율법문>연재를 마치고 마무리 삼아 꼭 들려드려야 할 법문이 혹 있지 않을까?

우선 2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이고, 다른 하나는 <열반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지금 틈틈이 정리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써 이 승의 임무는 일단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내용 있으면 간혹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신 길, 담마 따라서 부디 모든 분들 괴로움의 온전한 소멸에 이르소서!

  

                                                                                                                                                           불멸 2565(2021). 5.6

                                                                                                                                                          천림산 기슭에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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