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법문


아지비카, 자이나교, 회의주의 사상체계_냐나로까 스님 법문_테라와다법석(120406)

관리자
2024-11-10
조회수 879


* 아지비카, 자이나교, 회의주의 사상체계_냐나로까 스님 법문_테라와다법석(120406)

 

시작하십시다. 요즘 세상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웬만큼 사는 동네에서는 나라에서는 관점이 전부 다 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죠.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 삶이 엄청난 문제가 발생되고 있는데, 이런 와중에 우리가 정말 인위적으로라도 주목해야 될 방향이 꼭 불교를 떠나서 일반적으로 인류의 어떤 문화적인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인문 철학입니다. 그죠. 인문철학. 

 

우리가 '인문 철학'을 통해서 지정적인 측면을 개발하고 알아간다라는 것 그 자체가 어떤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하나의 또 오르가즘입니다. 그래서 인문 철학에 대한 여러분들의 관심과 또 직접적인 그 여러분들의 어떤 시간의 투여 삶에 있어서 시간의 투여, 이것이 여러분 자신들을 성장하고 또 정신적으로 자유를 향해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그런 의미의 연장에서 이런 강좌들이 여러분들을 굉장히 희열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거는 분명합니다. 만일 그 희열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순 강사 책임입니다. 

 

자, 그다음은 그다음에 주목해야 될 것이 아지비카파라고 있습니다. '아지비카(ajivika)'. 일종의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물론도 자연주의지만도. 

유명한 아지비카 학파의 대거두는 고살라라는 양반인데 이 아지비카의 물질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유물관 유물론관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그러나 뭐가 아주 획기적으로 다르냐면, 인간 존재의 물질성이 사후에도 존속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 인간도 물질로 봤습니다. 영혼 생명 이거 자체도 아지비카에서도 역시 물질로 봤거든요. 

그러나 이것이 죽음 이후에도 이것은 환원주의로 본 것이 아니라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는 단순한 그걸로 본 것이 아니라, 존속될 수 있는 걸로 즉 윤회를 인정하는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선 유물론하고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지비카 학파에서는 실재하는 것이 물질의 요소인 지수화풍 외에도 다른 것이 실재한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지수화풍이 결합되는 우선 장소로써의 허공 공간 이것도 실재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득-얻는다, 실-잃는다, 고-고통스러움, 낙-기쁨 희열, 그다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태어나고 죽는 것, 그리고 영혼, 이런 12개의 요소를 다 실재하는 걸로 보았습니다. 앞에 지수화풍과 공간은 기본적인 요소고요. 그다음에 득실 고락 생사 이런 것들은 그 기본적인 요소가 현상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것도 다 실재한다 라고 보았고, 영혼도 역시 실재한다. 단 마음 정신 이런 것이 물질과 별도로 차별성을 지닌 어떤 존재자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연장이다. 고것만이 좀 다르죠. 

그래서 영혼과 다섯 원소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원론'인 입장인 것 같으나 영혼은 물질적 요소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일원론'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의 관념은 브라흐만 사상 이후에 새로이 태어난 관념이 아닙니다. 

 

인도에서는 고대 종교 형태로 끊임없이 '물활론'이 있었습니다. 이 물활론은 꼭 인도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죠. 그 서양의 낭만주의 시대 때도 물활론 비슷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뭐 내가 바위와 대화를 하고 그지요, 내가 바다와 대화를 하고 산과 대화를 하고 하늘과 대화를 하고 또 나의 그 지극한 대화가 상대방한테 영향을 미치고, 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 근간이 물활론입니다.

모든 존재 안에는 생명이 있다. 영원히 있다. 이런 주의가 이 고급 종교의 형태로 종교가 형상되기 전부터 쭉 있어 왔다라는 거예요. 이거는 인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죠. 

인류 문화라는 것은 어떤 기원이 있어가지고 그 기원에서부터 점차 전파해 나간 이런 어떤 양상도 보이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보편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양상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샤머니즘' 같은 것은 인류가 원시 형태로 거주한 흔적이 있는 곳은 다 동시다발적으로 있거든요. 꼭 우리가 문명의 4대 발상지 거기서부터 문명이 일어나 가지고 점차 확장됨으로써 인류의 문화가 형성되고 이렇게만 봐선 안 됩니다. 

그러니까 샤머니즘이라는 것은 이제 우리의 삶의 전체의 대상, 저 우주 뭐 삶의 공간 또는 삶의 내용 이런 것들을 양·음·중성으로 3분절로 구조화시키려는 사상 체계가 샤머니즘이거든요. 그것을 현실적 현상으로서 드러난 모습이 소위 말하는 무당 푸닥거리입니다. 이 무당 푸닥거리를 샤머니즘의 어떤 원형 어떤 원류로 봐서는 안 되거든요. 

이런 샤마니즘 체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마는, 그러니까 이런 샤머니즘은 중국은 중국대로 일어났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대로 일어났고 저 남아메리카는 남아메리카의 무슨 페루니 이런 거 보면 지금 이제 문자의 해독이 지금도 불가능해가지고 그 신전 같은 것들 있으나 지금 해독이 안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다른 것이 아닐 겁니다. 

천지인에 대한 설명 예 양과 음이 만나가지고 중성화돼가는 중성을 향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이상으로 삼는, 그래서 인간은 천신과 지신과 인신과 끊임없이 결합을 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그때 천지인이라는 것은 가드(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신입니다. 


그때의 인간신이란 것은 신이라기보다는 현자! 현자! 그 인간들 중에서 소위 말하면 현명한 자. 그래서 양은 교육 또는 철학 이런 것을 담당하고, 음신은 생산을 담당하고 농사법 전쟁술 의술 이런 것을 담당하고, 인신은 이 양쪽을 다 가지고 일반인들 인간 백성의 정치를 구현해내는 이런 신, 

그래서 인신은 2명이 있는데, 이 인신은 하나는 이제 천신과 지신이 그룹에 있고, 한 존재는 소위 말하면 정치의 현실적 마당에 나아가 가지고 정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이런 존재, 그래서 인간 삶과 천신 지신을 잇는 그걸 커뮤니케이션 하는 존재가 천신과 지신 영역에 남아있는 인신에 해당되죠. 이것이 미르 무르 무당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천신 지신 인신은 뭔가가 보통 인간하고는 달라야 돼. 예 그래서 보통 인간과는 다른 형상을 하고 있고 다른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간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무슨 가면이나 여러 가지 어떤 그 칼라나 문양이나 이런 걸로써 카바를 해서 접촉을 하게 되고, 그리고 존재의 영역도 일반인들이 사는 그런 영역이 아니라 단절된 공간 그 단절된 공간은 어디냐? 산이다. 그래서 천지인 삼신은 꼭 산신이다. 산의 조형문자는 상형문자는 --형 3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산신은 삼신이 되고.

 

이런 사상은 꼭 문명 발상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동시다발적으로 인디언 영역, 그 인디언 뭡니까? 집 둥그렇게 해가지고 중간에 나무가 서고 그건 일종의 천지인이, 그 인신이 천신과 맞닿았다 이러는 그 상징물 중 하나가 코스모츄리(cosmic tree)-우주목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반드시 우주목이 들어갑니다. ---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물활론 역시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화의 한 양상이다. 이렇게 보면 될 것입니다. 물활론 하나 설명하는데 뭐 거창하게 샤머니즘 설명까지 다 나왔네요. 


어쨌든 이 영혼을 원자와 같은 그런 개념으로 본 것은 한걸음 더 나아간 철학적 사색이다라고 할 수 있겠죠. 오늘날에 와서도 이것은 무시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마음을 어떻게 풀이할 것이냐? 마음에 대한 해석, 근간에 뇌공학자나 생물학자들이 모여가지고 이제 달라이 라마가 모여서 그 하버드 쪽에서 모여가지고 끊임없는 마음에 대한 실체를 파헤치려고 몇 년간 지금 계속하고 있죠. 그중에 대부분이 지금 과학 쪽 입장에 서있는 학자들은 '뇌가 곧 마음이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런 원자론과 뭐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죠. 예 부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뇌의 어느 부분이 딱 망가져 버리면 어떤 감정이나 정서의 불구자가 됩니다. 그거는 뭐를 이야기하느냐? 뇌라는 부분적인 어느 물질적인 영역 그것이 마음을 컨트롤한다 라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깡그리하게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달라이라마께서는 그걸 이렇게 또 설명하고 있죠. “그건 옳다” 달라이라마께서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인간에 깊숙이 흐르고 있는 도도히 흐르고 있는 생명이 있는 한 흐르고 있는 미세 마음이 있다. 미세 의식이 있다. 이것은 뇌하고 별도의 영역이다. 영역이라고 해가지고 어떤 물리적인 어떤 범위 카테고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을 잡고 물질의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해석을 할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로 봤을 때는 분명히 아지비카 쪽의 마음도 원자론의 입장에서 보는 이런 관점 이것이 깡그리하게 부정되어서는 또 아니 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어쨌든 간에 이 아지비카의 대표적인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는 이미 운명이라는 것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 운명은 누가 정하느냐? 그거는 모른다. 그리고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마치 동양 사상의 특히 이제 중국 사상의 예 팔자론, 사주 사주팔자 하는 이것과 좀 흡사한, 사주팔자는 옛날 중국의 샤마니즘 사고방식은 사주팔자는 변하는 것이 아니죠. 변하는 건 아닙니다. 

 

그처럼 운명의 결정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생사 윤회 같은 것도 무인이다. 원인이 없다. 그리고 어떤 조건 지어진 것이 없다. 

조건 지어졌다면 조건의 요인을 변하게 만들면 결과가 바뀝니다. 근데 그렇지 않다. 왜?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지어있기 때문에 이것은 변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변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를 부정해 버립니다. 자유의지를. 

 

그래서 이 아지비카의 중요한 주제는 분명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본성을 가집니다. 스와바와, 아까 스아바와 본성 즉 본체를 지니고 있다. 그다음에 우연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한 주제로 삶에 있어서 사색에 있어 철학적 사색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됩니다. 


그래서 해탈도 또한 무인이다. 무연이다. 그런 해탈도 내가 자유의지에 의해가지고 수행해서 막 노력한다 해가지고 해탈이 시기가 단축되거나 이러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운명과 우연과 그리고 본성에 의해서 받은 그것이 일생 동안 지배해야 되고 또 유래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그거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를 부정하고, 개인에 의해 개인의 업에 의한 인과응보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 이것을 부정한 철저한 '결정론'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브라흐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수많은 신들 이것은 곧 도덕 파괴의 존재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건데 무슨 신에게 공물을 바쳐서 제사를 지내고 한다 해가지고 구원을 받고 그런 것은 없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태초의 시작이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따라서 그것들은 인간 통제에 벗어나 있다고 보는 일종의 '진화론적 생물론'입니다. 진화론적 생물론. 

그래서 자연주의는 이 아지비카는 운명 종 동물로 태어났느냐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이 종, 그다음에 천성 스와바와 본성 자성 이런 것들이 중심 개념으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존재자가 인간이나 동물로 현실에 있어서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게 됩니다. 

운명적으로 미리 정해져서 태어났다라는 것이에요.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을 했는데, 그러나 자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실타래가 있어. 그런데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 실타래를 던집니다. 실타래가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에 한없이 한없이 밑으로 굴러내려갈 거예요. 그래서 한없이 굴러내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실타래이기 때문에 끝은 있을 것 아닌가. 끝은 있다라는 거예요. 그 끝이 자유가 됩니다. 해탈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그냥 노력을 해야 한다. 해탈할 때까지. 이유가 없다. 너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다. 


그래서 언제 동안? 840만 겁 동안! 팔백사십만 겁 동안 그냥 그냥 노력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윤회를 거듭하다 보면 그냥 해탈한다. 

이 겁(劫)이라는 개념은 대단한 개념이거든요. 그죠.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까? 

일생 1미터 1미터 1미터 바윗덩어리에 하얀 샤, 이거보다 더 얄프리한 걸 한번 쓱 걸쳐가지고 한번 쓱 스치기만 했는데, 그 1미터 1미터 1평방미터의 암석이 다 없어지는 기간이 1겁이라. 그러니까 이게 840만 겁, 그것도 840이 아니라 840만 겁 동안에. 그러니까 참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그런 시간적 단위지요. 

그러나 어쨌든 간에 자유 의지는 없지만, 그런 자유는 분명히 있다. 분명히 있다. 없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렇게 아지비카 역시 우리의 삶과 경험을 설명하면서도 역시 그런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은, 이 역시 어떤 객관성 보편타당성적인 어떤 것 이에 대한 설명에 대한 매력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주의를 다 부정은 하고 있으나 브라흐만의 반대편에 있는 사상들이 그러나 그 속에 또 하나의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계속 상정해 놓고 있다라는 겁니다. 이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쨌든 이것이 아지비카고요. 


또 하나 이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될 사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대한 종교체계로서 체계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신앙입니다. 

인도에서 '자이나교(jainism)' 자이나교 이거는 거의 불교와 동시대에 성립되었습니다. 마하 위하라라는 대단한 철학자에 의해서 세워진 종교거든요. 이 자이나라는 말은 승자라는 말입니다. 이길 승(勝)자, 승자의 가르침의 교다 뭐 이런 뜻인데, 마하 위하라(마하 비라, Mahavira)에 의해서 이 체계가 잡혔습니다. 마하라는 것은 크다는 이야기지요, 위하라(비라, vira) 라는 말은 영웅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오 대 깨달음을 얻은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근데 마하 비라는 앞에서 이야기한 아지비카 고살라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니까 원칙적인 세상 사상은 결정론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결정론에서는 뭡니까? 아까 이야기한 자유 의지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적 자유의지가 부정당했죠. 근데 마하 위하라는 이것은 부정만 할 수 없다 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유 의지의 타당성도 인정을 해줘야만 한다. 

근데 그걸 인정하기 위해선 인간의 감정적인 면, 정서적인 면, 어 인간의 심리학적인 면, 이런 것들이 그대로 이해가 되어 드러나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첫 번째 전제조건의 숙명론 결정론 이것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두 개는 상반된 개념이거든요. 

 

그러니까 결정론 숙명론 이것은 부정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내적 감정 경험 체계는 인정이 되는 이런 이론이 필요했던 겁니다. 요걸 교묘하게 교묘하게 완성시킵니다. 뭐를 통해서? '행위 이론'을 통해서.

행위라는 것은 뭡니까? 행위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굉장히 물질적인 겁니다. 그죠. 유물론적인 거죠. 근데 우리의 행위는 내적 심리나 내적 감정 없이 그냥 우연하게 일어났을까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죠. 그러니까 행위라는 행위를 했다는 자체는 내적 어떤 정서감정 이런 것들을 동시에 설명해 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인 결정론과 내면에 인간이 내적 감정이입 이런 것들을 플러스시킨 것이 행위라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심리학에 보면은 심리학적 자료에 보면 행동심리학이란 것이 있습니다. 어떤 동기보다는 지금 겉으로 드러난 그것에 주목을 해야 된다 라는 심리학입니다. 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안에는 이미 내적 원인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래서 행동을 가지고 그 원인 어떤 심리상태 이것을 규명해내는 심리학입니다. 이거와 매우 유사한 관점을 지니고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겁니다. 

 

이 자이나교 이론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왜? 이것을 2개를 결합시키려고 하다보니까 굉장히 난맥의 이론적 체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좀 합리적인 것 다시 내가 말하는 합리적이라는 원래 합리의 원 뜻은 그릇은 요만한데 그릇 안에 잡아야 될 것은 이제 이만해. 그러니까 안 들어가죠. 이걸 어떻게 어떻게 조작을 해가지고 이 그릇 안에 잡아넣는 거야. 이걸 합리화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론이 굉장히 복잡하게 됩니다. 

 

뭐 그거 전체를 저도 완전히 언어적으로 완전히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또 우리 불교 공부하는 데서는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뭐 그렇게 필요한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조금 자이나교를 우리가 좀 바라볼 수 있는 핵심적인 부분만 건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브라흐마, 이 '브라흐만교'의 사상가들은 사상가들이 객관뿐만 아니라 주관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궁극적 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적인 자아 즉 지와아트만을 상정을 했다. 이미 이야기를 했죠. 마하 위하라는 그 자체가 이미 궁극적 객관성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고수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인간 의지의 타당성, 어떤 감정적인 것 정서적인 것 이런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간 심리를 경험적으로 분석하는 데 말려들 수도 없었습니다. 왜? 생물학적 숙명론을 탄탄하게 그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생물학적인 결정론에서는 마찬가지로 객관적이지 않은 만큼의 객관적인 심리이론, 객관적인 심리는 이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객관적이지 않은 심리의 상태가 각 개인 개인마다 있다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거의 이 마하 위라의 독창성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개념이나 브라흐만 개념 이런 절대주의적 본체 절대주의적 본질 개념 이런 게 돌아가지도 않으면서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해 내야겠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행위이론인데 이 행위이론이 즉 자이나교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마하 위라에 의하면 이 행위에는 신체적인 것 언어적인 것 정신적인 것의 3가지가 있습니다. 이 3가지를 나누어서 이론적으로 전개를 합니다. 전개를 하는데 그 지향점은 뭡니까? '결정론'에 있습니다. 결정론에 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철두철미하게 이런 것들이 브라흐만 사상을 부정을 해가지고 상대주의로 가 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걸려버려. 그래서 또 하나의 다른 양상의 절대주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의 수행 방법을 보면은 이제 극단적 방법을 취하게 되지요. 이 행위는 이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전지성(全知性), 전지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내 행위는 내 행위 자체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내 행위 자체가 절대적으로 선함으로 연결되어야 돼. 거기서 악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 불교에선 어떻게 됩니까? 내가 이래 강의를 하다가 칠판에 뭐를 쓰기 위해서 내가 뒤돌았어. 뒤돌았는데 내 의도는 칠판에 글을 쓰기 위해서 돌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도 모르게 갓난아이를 뒤에 갖다 놨어. 그러니까 발을 밟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불구가 되어 버렸어. 이럴 경우에 나는 업을 지었습니까? 업을 짓지 않았습니까? (수행자들 대답...) 

왜 지었습니까? 나는 그 애를 다치게 하려는 사악한 마음이 없는데. 불교적 관점에서는 업은 형성되질 않았습니다. 나는 그 애를 해치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거야. 그 의도가 전혀 내한텐 없어. 다시 말하면 악의가 없었다는 겁니다. 나의 자유의지 안에 악의가 없었어. 

그러니까 업은 형성되지 않아. 그러나 과보는 있어. 그렇지 않습니까? 그 애의 어머니는 당장에 달려서 내 멱살을 잡겠지. 스님이고 나발이고. 그죠. 내 멱살을 잡아요.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3대의 손이 막혔는데, 하고 이제 멱살을 잡고, 그런 과보는 있어. 

 

그런데 자이나교 입장에서는 업이고 과보고 간에 무조건 절대적으로 니가 잘못했다. 왜? 전지성(全知性)이 없었다.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진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지녀야 한다. 그것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서 앙굴리말라나 또는 목갈라나나 마지막 대열반에 들어가는 과정이 참 우리를 안타깝게 하죠. 다른 사람한테 뭇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아서 죽습니다. 전생의 업이고 여러 가지 이런 이유에서. 자이나교 입장에서는 그런 게 인정돼서는 아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네들이 전지성(全知性)이라는 극단적 절대주의적 지혜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에는 중요한 것이 인제 불교의 5계가 있죠. 그중에 4계는 동일한데요. 불살생 그다음에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는 것 불투도, 그 다음에 불음 삿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 그중에서 특히 불살생 같은 거 이거는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길을 걷더라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물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지요. 뭐 박테리아니 세균도 있을 것이고, 또 개미들도 있을 것이고. 얘네들을 죽이는 것조차 전부 다 업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깐 갈 때도 바로 못 가. 깨끗이 쓸면서 가야 돼. 이런 극단적 행위를 보입니다. 그리고 콧물 침물 나오면 이게 떨어지면 세균이 죽어. 그래서 코에도 요렇게 뭐 주머니를 만들어서 달고, 입에도 주머니를 만들어서 달고, 이렇게 극단적 행위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자이나교를 보면 인생을 4등분으로 해가지고는 이제 60이 넘으면 모든 생산행위를 그쳐버리고 반드시 수행자가 돼서 업을 무너뜨려야 되지요.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나의 업이 부정에 의해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부정을 닦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뭐냐? 고행이다. 그래서 신체를 학대합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면 내놓지 아니하고 음식을 굶어버리고 막 이렇게 극단적 고행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극단적 고행'으로 나아간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순수'로 보일 수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 종교를 지탱하게 된 현실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인도에서는 그 숫자가 불교인보다 더 많습니다. 15프로 정도. 굉장히 많은 거죠. 지금은 불교 인구가 거의 8프로를 넘어가지고 10프로에 육박합니다마는, 이제 한 50년 30년 4~50년 전만 해도 5프로 이상을 넘지는 못했다고 그러거든요. 그때도 15프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그럽니다. 이 자이나교가. 

 

그런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게 지었던 그 모든 행위들 그런 행위가 전부 다 업에 속박되어 있다. 그 업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는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60 이후에는 모든 생업을 끊어버리고 반드시 사마나가 돼 가지고 수행자가 되어 가지고 고행을 해야 한다. 그 고행의 정도에 따라서 업의 오염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가가 결정된다. 

이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살생, 다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그다음에 훔치지 않는 것, 그다음에 삿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 그다음에 하나가 무소유입니다. 무소유. 이제 불교의 5계 중에서 요게 좀 다르지요. 그래서 60이 넘어가서 고행자가 되었을 때는 의복마저도 소유하지 않는 것, 절대 무소유주의로 나아갑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출가하게 된 동기가 이제 예 우리나라에 제일 처음 위빳사나, 이 테라와다 불교라기보다는 위빠사나 수행 방법을 전달해 주신 거해 스님, 1989년도에 우빤디따 스님과 우자띨라 스님 두 분이 스님을 모시고 이 승가사에서 약 30명 정도의 비구니 스님을 모아놓고 위빳사나 수행을 첫 강의를 하셨거든요. 거행을 했거든요. 그 이듬해에 거해 스님께서는 바로 이 대원정사에서 그때는 관음전이라고 큰 법당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때 11일 10일 동안인가 수련법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저는 개인적으로 마석 산속에 있을 땐데, 신문을 보고 위빳사나 수행법회가 있다고 그랬는데 위빳사나가 뭔지도 무슨 뜻인가도 몰랐습니다. 다만 그때 저도 그때는 대승 불교는 옳고 남방불교는 전부 다 소승이고 그래서 그거는 하급적이고 이렇게 막연하게 알고 있을 때입니다. 근데 왠지 그걸 봤을 때 이거는 놓쳐서는 아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우리 동네에 허정이라고 조계종의 스님이었다가 환속한 분이 있었습니다. 번역을 해가지고 주로 살고 있었는데, 가끔 그분이 제 작업실을 찾아왔기 때문에 종종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때 그 스님께서 “아 이 선생님 남방불교에 있는 쪽이 단순하게 우리 쪽에는 소승 소승 하고 있는데, 우리보다는 훨씬 더 순수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정도가 전부라. 근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꼭 놓치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예 서울에서 한 10일 묵을 10일 동안 있을 차비를 하고는 나와 가지고 비어있는 아파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지인의. 그걸 있어도 된다길래 거기에 놓고 낮에는 내 작업하면서 저녁 무렵이 됐을 때 들으러 왔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 푹 빠져가지고는 어떻게 이런 불교가 있을 수 있는가요? 푹 빠져가지고는, 그 이듬해에 이제 스님과 함께 한 15명이 1달을 예정으로 이제 타일랜드를 거쳐서 네팔을 거쳐서 인도 4대 성지를 여행이 아니라 수행을 떠났습니다. 그 수행의 여정을 저는 잊지 못하는데요. 각 제따와나니 룸비니니 그 부근에 있는 타일랜드나 미얀마 사찰에 묵으면서 저희들 우리끼리 밥 해먹어 가면서, 이렇게 각 유적지 4대 유적지에서 한 5일에서 1주일씩 수행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사르나트에 갔을 때 공원에 딱 갔는데 이 자이나교도를 만났습니다. 진짜 몸은 새카매 가지고 헐떡 벗고 있더라구요. 근데 몸은 막 목욕도 안 하거든요. 무소유, 목욕도 안 해. 그런데 반질반질반질 이렇게 잘잘잘잘 기름기가 흐르고 있는 거야. 그런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어쨌든 이 자이나교도 또 하나의 객관성을 향해서 갈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상대주의를 포기를 했다. 그것이 이 자이나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한계입니다. 한계. 

 

그다음에 인제 또 하나가 있는데요. '산자야'입니다. '회의주의'

이 산자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가지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불가지론. 그래서 그런 인도 사상사에 처음으로 ‘회의론자’로써 등장하게 됩니다. 

내세가 존재하는가? 선악의 과보는 존재하는가? 인격 완성자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아주 대답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대답은 합니다. 근데 그게 애매모호해. 아무런 결론이 없어. 미꾸라지와 같이 빠져나가기만 나가. 그 유명한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바로 산자야의 제자였습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이 산자야의 제자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그거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렇게 우리가 보면 안 될까요? 다시 말하면 오랫동안 몇천 년 동안에 도도히 흘러왔던 인도의 중심 사상 브라흐만 사상, 이거는 안 된다. 즉 지식인들은 이것을 느꼈다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죠. 다시 말하면 본체 사상 이것은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그 당시의 지인이 알고 있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에 대한 안티로서 이때까지 이야기한 유물론이니 아지비카니 자이나니 이런 것들이 나왔지 않습니까? 그것 역시 명쾌한 해답이 될 수 없었다라는 것을 목갈라나와 사리뿟따는 알고 있었다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도 합류를 할 수 없었어. 그러면 산자야에게 있었던 것은 뭐냐? 모든 것을 명쾌하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그 부정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그래서 산자야가 어떠한 결론을 해답을 내놓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니냐?

 

그래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절친한 두 친구였죠. 그래서 사리뿟따가 먼저 붓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목갈라나한테 권유를 할 때 이런 표현을 합니다. "붓다께서는 인연 따라 원인, 원인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의 인과와 원인 결과와 소멸에 대해 소상하게 말씀하여 주셨다." 명확한 대답을 주신 거예요. "위대한 출가자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이시네. 이론가이시네." 라고 하면서 권유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밑에 있던 제자들을 데리고 붓다에게로 가지요. 산자야가 돌아와서 보니깐 두 자기의 양대 쌍맥이 당대 제일 걸출한 인재가 자기를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러자 피를 토하고 죽어. 피를 토하고. 얼마나 애통하고 자기 자학을 했으면.

 

어쨌든 간에 이 산자야는 철두철미하게 브라만 사상의 안티에 있었다라는 측면에서 평가받을 만합니다. 단 한 개는 부정만 했지, 그거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어쨌든 이것은 아니다. 니는 아니다. 라는 확실한 뭐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확실한 뭐가 없었습니다. 왜냐? 부정을 했지만, 또 하나의 뭡니까? 객관적 타당성을 찾아서 나섰지 않았습니까? 산자야는 최소한도 그것도 거부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본체라는 것은 허위다 라는 것만큼은 확고하게 느꼈던 자였다라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인도의 인도 사상계의 최초의 회의론자로 남습니다. 그 산자야의 어떤 공덕은 거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대충 이 정도가 대충 이 정도가 고따마 붓다께서 태어나셨을 때 인도의 전반적인 혼란 전반적으로 사상이 그 아주 혼잡 속에서 난무를 했던 사상계의 경향이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태어나서 이제 공부를 할 때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이런 모든 사상 체계를 고따마께서는 다 체득을 하십니다. 일단은 경험을 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네들 가지고 있던 수행체계도 다 답습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시고 당신만의 사색에 의해서 사색으로 당신만의 방법에 의해서 대 깨달음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이라고 할 수 있네요. 이제 불교 이야기 들어가기가 이렇게도 어렵네요.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이제 석가모니 다시 말해서 샤카모니 고타마 붓다의 불교의 진면목을 보기 시작을 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 아까 자이나교 설명을 하시면서 “업은 없는데 과보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불교는 원래 업이 과보가 아닌 가요? )

스님 :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가 과보고, 업은 업의 조건은 뭡니까? 내 마음속에 반드시 악의가 있어야 합니다. 악의가, 나쁜 마음이 있어야 돼. 

(수행자 질문 : 그러면 그 과보는 어떻게 나타나는 거예요? 아까 같이 이제 어린아이 발을 밟았을 때...)

스님 : 과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과보라는 것은 꼭 옳고 그름의 진리 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보는 그야말로 원인에 대한 결과일 뿐이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악한 사람의 집단 속에 있을 때 그 집단 속에서 옳은 일을 내가 했다고 그러자. 그래서 과보는 잘못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의 인식의 오류 때문에. 이 2개는 꼭 이꼬르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속에는 뭐 합집합과 부분 집합의 관계는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정확하게 동일 개념은 아니라는 겁니다. 동일 개념은 아니다.

앞으로 이제 그러한 것들이 자세하게 설명될 것입니다. 불교의 원인 결과를 특히나 연기법 이런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늘 강의 내용은 다소 개념적으로 이해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개념적으로 조금 뭐 오리무중이고 애매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없으면 애매한 부분은 너무 밝힐려 하지 말고 그냥 그냥 지나가십시오. 지나가서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그게 확연하게 좀 드러납니다. 어떤 주안점을 이야기를 할 때 주안점 자체를 부각시키는 것도 있지만 또 주안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옆에 것을 죽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죠. 

예 그러니까 뭐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불교를 점차적으로 더 명징스럽게 알아가면은 불교 외적인 사상 체계도 자연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근데 우리의 목적은 이제 또 불교를 보다 입체적으로 안다는 데 있으니까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이것은 설사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십시오. 그러면 그렇지 않습니까? 4학년 되면 3학년 때 거 모르던 거 확실히 알게 되고 그죠. 5학년 올라가면 4학년 때 모르던 걸 탁 알게 되지 않습니까? 일 년만 참으면.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과외수업 학원 갈 필요가 없는 거지. 1년만 참으면. 




* 출처 원문: https://cafe.naver.com/buddhayana1/2467



0

INFORMATION


단체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고유번호 : 138-82-04817

이사장: 박석현

주소 :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신양3길 70

TEL: 010-7514-1998/ 010-3181-2316 

E-MAIL: sura.ambattha@gmail.com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

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RMATION


단체명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법인등록번호 : 135-321-0000777

고유번호 : 138-82-04817

이사장: 박석현

주소 :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신양3길 70




TEL:   010-7514-1998/ 010-3181-2316

E-MAIL: sura.ambattha@gmail.com


Copyright©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 사무국

ALL RIGHTS RESERVED.




© BYULZZI Corp. All Rights Reserved. hosting by byulz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