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법문


사띠(sati) (20090630)

사깜마
2024-10-17
조회수 104


* 사띠(sati) (20090630) 


저번 시간까지 수행의 예비단계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저번 시간에 뭐까지 얘기를 했죠?

성인을 비방한 것이 있으면 용서를 구하고, 또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참회하고 용서하라 하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부처님 법은 가끔씩 단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봄에 경작물을 재배할 때는 필수적으로 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비가 오면 좋지 않죠? 그렇다고 해가지고 비가 안 오게 할 수는 없다는 거라. 농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들이나 비가 꼭 필요한 곳에서는 비가 반드시 와야 되기 때문에, 법을 설하는데 어떤 특정인을 대상으로 해서 법을 설할 때도 있지만 오늘 여기 같이 여러 사람 대중이 모인 곳에서 법을 설할 때는 어떤 사람에게는 이 소리가 안 들리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 소리가 들리게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진리를 '법우(法雨)다' '비와 같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법의 단비가 내렸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게 법우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주 귀에 거슬리는 그런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번에 얘기했던 마간디야도 꼭 마찬가집니다. 부모님에게는 그게 단비가 됐지마는 마간디야 그 자신에게는 악한 마음을 품게 하는 그런 말씀이 될 수도 있다 하는 거라. 혹시라도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이 들면 수행하는 데는 큰 장애를 가져오게 됩니다. 


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법에 대한 믿음들을 가져야됩니다. 

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데는 가장 으뜸이 부처님 말씀을 듣는 거라고 돼있는데 그 부처님 말씀을 듣고 오히려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할 거 같으면 법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많이 차단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회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하는 것은 그러한 마음들, 집착하고 배척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내려놔라 하는 것이 그런 것들에 해당이 됩니다. 


오늘은 이어서 사띠(sati)에 대한 얘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띠를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 법회 시작하면서 맨 처음 시작한 게 뭡니까? 삼귀의 삼창하고 그다음에 한 게 뭡니까? 오계죠! 항상 어떤 법회든지 삼귀의와 오계가 기본이 됩니다. 어떤 법회를 시작하더라도 이것을 먼저 하고 법회가 시작이 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계율을 안 지키게 되면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거기에 대해서 후회를 하게 되고, 또 자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아! 내가 이거 이래선 안 되는데'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마음이 평상심으로 돌아가기가 힘들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마음을 계발하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그런 훈련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율을 어기면 당연히 그 죄책감으로 인해서 후회하게 되고, 또 불안하게 되고, 또 여러 가지 침착하지 못한 경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긴장이 오게 되고, 그래서 계율을 따라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그 계율은 안 합니다. 내가 잘못하는 걸 아니까. 안다고 해가지고, 안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걸 오히려 함으로 인서, 지극정성으로 '아! 이건 내가 잘못했다. 다신 하지 말아야지'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계율은 마음에서 사띠와 사마디를 가져다 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서 참회하고 다신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하다가 보면 후회하는 일에 시달리질 않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져오기 때문에 사띠와 사마디를 가져온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오계를 받아 지니려고 하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마음으로 오계를 받아 지니도록 해야됩니다. 

'지닌다'는 것은 '그것을 따른다'는 겁니다. 받기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걸 받았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 지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수행을 지속해나가고 수행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계를 수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 선원에 오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집에서 하라. 집에서.


수행하기 전에 오계에 대해서 회상을 하면서 빨리어 중에 만약에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남의 생명 해치지 않고 살아가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하고 마음으로 외우고, 이어서 "아딘나다나..." 이런 식으로 오계를 자꾸 외우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수행을 하는 게 좋습니다.

빨리어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빨리어로 암송을 해도 좋지만은 그렇지 않을 때는 분명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의미를 파악을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그렇게 해야됩니다.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들, 그런 것들을 삼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실이 아니거나 유익하지 않거나 나쁜 악의를 가지는 그런 거짓말들도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으로 또한 나쁜 의도를 가지는 것들도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나서, 수행을 시작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러면 사띠(sati)에 대해서 한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띠에 대한 의미는 누누이 얘기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부처님의 제자였던 아난다, 아난다 존자를 수다원에 이르게 했던 분이 뿐냐 존자입니다. 뿐냐 존자가 아난다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십니까? 

항상 아난다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나는 수행을 참 잘 못한다. 부처님 시봉하기도 바쁘고 부처님 말씀 들어서 그걸 외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바쁘니까, 나는 수행 할 시간도 별로 없고, 또 내가 수행을 이렇게 해보니까 수행 그거 참 잘 안 되더라. 그래서 나는 수행을 잘 못한다.' 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거든.

뿐냐 존자가 아난다 존자에게 그럽니다. 

“아난다야! 나는 수행을 잘 못한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실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지 않으면 나는 수행을 잘 못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고 있고, 무상한 것이고, 그리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니라. 그런데 너는 항상 나는 수행을 잘 못한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생각도 무상한 것이다. 몸도 마음도 무상한 것일 뿐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일으키는 생각도 무상한 것이다. 어떤 것이든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고 내 자신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봐라. 그럴 거 같으면 너는 수행을 잘 할 수 있다.”

애초부터 나는 수행을 해봐야 잘 안 된다. 왜 이리 진척이 없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품지 않고 수행을 하다보니까 수다원에 이릅니다. 아난다 존자가 그러고 나서는 항상 아침에 일어나서든지 잠자리에 들기 전 저녁이 되면 뿐냐 존자한테 꼭 삼배를 드리고,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고 그렇게 했다고 그럽니다.


사띠를 한다고 하는데, 사띠를 하지 않았을 때는 통상적으로 탐진치가 일어납니다. 

탐심(貪心)도 거친 형태가 있고 미세한 형태가 있고, 진심(瞋心)도 거친 형태가 있고 미세한 형태가 있고, 치심(癡心)도 거친 형태가 있고 미세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거라.

탐심(貪心). 만약에 남의 물건을 예쁜 것이 있어가지고 그걸 훔쳤다. 도둑놈들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 이건 내 것이 되었다'라는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게 탐심(貪心)의 거친 형태들이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일 겁니다. 남의 물건을 보고 그것을 실제로 훔치지 않더라도 훔치는 마음을 일으켜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기쁜 마음을, 정신적인 집착을 일으켰다고 할 거 같으면 탐심의 거친 형태들이라는 거라.

사띠가 없었다는 거라. 사띠를 했을 거 같으면 그런 마음을 내지 못한다는 거라.


또 여름이니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거, 아이스크림 같은 거, 달달한 거,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들, 그거 먹으면 즐겁거든. 그런 것들은 탐심의 미세한 형태들이라는 거라. 실제로 먹어보니까 즐겁고 좋다는 거라. 술을 먹으니까 기쁘고 즐겁다는 거라. 아이스크림이나 술을 먹으면서 그런 즐거운 마음을 일으켰다면 '아! 내가 지금 탐심을 가지고 있구나. 사띠하고 있지 않구나.' 하고 빨리 판단을 해야됩니다. 밥 먹고 나서 오늘 뭐 먹기로 했어요? 국수 해 먹기로 했지? 국수 먹으면서 '아이 맛있다' 이렇게 먹지 말아라는 거라. 수행하는 자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라. 

탐심도 이렇게 거친 형태가 있고 미세한 형태들이 있습니다. 거친 형태는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미세한 형태는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탐심은 탐심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알아차리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진심(瞋心), 성내는 것! 

나하고 의견이 안 맞는 사람이나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 그 사람만 보면 고마 싫은 마음이 탁 일어나는 거라. 증오감이 탁 일어나고 그 사람이 뭔 말을 하든지 간에 삐딱하게 들리는 거라. 이게 진심의 거친 형태들이라는 거라.

진심의 미세한 형태는 어떤 거냐 하면 오늘 법회 10시부터 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행히 10시 전에 다 왔어. 그런데 스님 법문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탁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짜증이 나는 거라. '좀 일찍 오지', 아니면 좀 있으면 부엌에서 일을 하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고 한 사람에게는 그런 마음 잘 품지 못하는데, 인제 막 수행 초보든지 아니면 나이가 적은 사람이 뭘 잘못하면 금방 짜증을 내는 거라. 실제적으로 짜증을 내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에이구' 하는 그런 마음은, 이게 진심의 미세한 형태입니다. 마음속으로라도 그런 것들을 품지 말아라는 거라. '아, 내가 사띠하지 않았구나' 하고 빨리 판단을 해야 된다는 거라.


치심(癡心), 어리석은 것들!

어리석은 것은 어떤 면에서는 멍청한 겁니다. 내가 지금 뭘 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멍청하게 있는 것, 지금 분명히 내가 할 일이 있는데 그런 의욕을 안 낸다는 거라. 차라리 성낼 일이 있으면 성내버리고 '아! 내가 성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되는데, 성낼 일이 있는데도 성도 내지 않고 그냥 멍청해 있는 거라. 그거는 치심의 거친 형태들입니다.

그거는 금방 알 수가 있는데 미세한 형태들은 어떤 것이냐 하면 무관심한 것. 남이 어찌 되든 간에 나하고는 관계없는 거라. 처음 초보자들이 수행하러 왔는데 사실은 수행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릅니다. 모두 내 수행하기 바쁜 거라. 무관심해버리는 거라. 그리고 방심해버린다는 거라. 지금 내 입장에서 뭘 해야 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판단하지도 않고, 그것을 실천하지도 않고, 그냥 무관심해버린다든지, 안 그러면 목적 없이 방심하고 그냥 멍하게 있어버린다든지, 그게 인제 치심의 미세한 형태들입니다.


사띠가 없으면 이렇게 탐 진 치라고 하는 것이 항상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 수행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사띠를 하겠지. 사띠를 하더라도 바른 사띠를 하는 거하고, 바르지 못한 사띠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사띠를 하면서 바른 사띠를 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또한 안 됩니다. 사띠를 하고 있더라도 바른 사띠를 못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뭡니까? 실재적인 것을 사띠하지 않고 통념적인 걸 사띠합니다. 움직임이나 느낌들을 사띠하지 못하고 모양이나 형태들을 사띠하고 있다는 거라. '일어남' '사라짐' 명칭을 사띠하고 있다는 거라. 바른 사띠 안 하고 있다는 거라.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여기에 잡혀가지고 내내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알기는 아는데, 그 움직임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실재적인 현상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맹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라. 바른 사띠를 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라. 사띠는 하더라도 바른 사띠는 되지 못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지금 스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있는데 내 마음이 스님의 말소리에 가 있으면 그것도 바른 사띠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여러분들 귀에 딱 붙어가지고 귓가에서만 소리가 들려야지, 저 멀리서 들리고 있으면 그건 바른 사띠를 못하고 있다는 거라. 사띠를 하더라도 바른 사띠를 못하면 이렇게 외부적인 것들, 밖에 대상들에 마음이 쏠리게끔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눈으로 예쁜 것을 보면 '아, 예쁘다'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고, 그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일으키게 되는 거고. 

또 여러분들이 스님 말을 듣고 있으면서 그걸 인식할 때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인식, 귓가에서 들리는 이 소리에서만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다, 아니면 생각을 하고 있다, 소리는 어렴풋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명확하게 그걸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바른 사띠를 못한다는 거라. 


항상 지금 현재에 사띠를 하고 있어야지 과거에 대해서 인식하게 될 거 같으면 그건 바른 사띠가 아니라는 거라. 왜? 현재는 항상 지금 있기 때문에. 현재는 항상 지금 현재 내 앞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을 사띠를 못한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과거나 미래는 위빳사나 수행을 안 하고 있는 거라.


또한 대상에서 탐진치가 일어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바른 사띠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 이미 오염된 상태, 오염된 마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거는 사띠가 아니라는 거라. 생각을 하면서 막 화가 일어났다, 화가 일어나는 건 진심(瞋心)인데, 진심으로 인해서 이미 마음이 오염되었는데 그래서 영향을 받고 있는데 내가 사띠한다고 그 진심을 알아차리고 있느냐는 거라.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바른 사띠를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진심이 더 일어나는 거라.

다리가 아파서 다리를 알아차림 한다고 '통증' '통증'하고 있는데 이걸 알아차리니까 금방 이게 사라져야 되는데 이게 사라지지 못하고 더 아파. 바른 사띠를 안 하고 있다는 거라.


현재에 머물지를 못했고, 바르게 대상을 객관적으로 집착하려고도 하지 않고 배척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거라. 탐진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띠하고 있다는 거라. 이것도 바른 사띠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라. 이러니까 바른 사띠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항상,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지혜를 동반하지 못한다는 거라.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른다는 거라. 


그럴 때는 빨리 그러면 '아! 이게 바른 사띠가 아니다'하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든지 아니면 호흡으로 돌아오든지 해서 지혜롭게 그 대상을 사라지게끔 만들어야 되는데 그런 마음을 내지 못한다는 거라. 지혜가 동반이 안 된다는 거라.


사띠를 하면서도 이렇게 바른 사띠를 못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예 사띠를 안 하고 탐진치의 거칠고 미세한 형태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 더 나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띠를 한다고 하면서 바른 사띠를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른 사띠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있는 그대로의 대상, 그것도 궁극적인 실재를 인식해야 그게 바른 사띠입니다. 

지금 현재 나타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그것도 궁극적인 실재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또한 지금 나타난 대상, 나타난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사띠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일회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궁극적인 실재를 사띠하고 인식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항상 지혜를 동반하게끔 됩니다. 

지혜를 동반하니까 사띠하는 동안에는 번뇌에 물들지 않고 번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버린다는 겁니다. 번뇌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순수하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바른 사띠를 할 때에는 이 다섯 가지가 항상 동반되게끔 됩니다.

번뇌에 물들지도 않아야 되고, 그리고 명확하게 알아차림 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알아차림을 하게끔 되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을 항상 알아차림 해야 되고, 궁극적인 실재를 알아차림 하게 되는 거고, 그 알아차림이 지속적으로 연결이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른 사띠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띠와 사띠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들입니다.


자! 그러면 사띠에 관한 것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바른 사띠를 할려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금 일어나는 대상 하나를 잡아서 사띠를 해야 됩니다. 두 개를 잡을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딱 하나만. 항상 마음을 그렇게 먹어야 됩니다. 지금 바로 앞에 나타나는 대상 하나만 딱 알아차린다고 생각을 해야지, 그걸 뭉뚱그려가지고 다 알아차릴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순간순간에 머물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사띠를 챙기는 대상이 진실한 대상이 되어나갑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될 것은 대상을 보고 그것을 상상하거나, 기억하거나,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 잘 하는 거 있죠? 호흡 '일어남, 사라짐' 내 기억 속에 있는 '일어남, 사라짐'을 가지고 사띠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또 상상을 한다는 거라. '배가 불러올 때는 당연히 일어남 하고, 배가 불러올 때는 팽창하는 느낌이 있다.' 이렇게 먼저 그 상상을 해버릴 거 같으면 마음은 두 개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놓쳐버린다는 거라. 팽창하는 느낌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일으킨 대상으로 인한 느낌인 것이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대상을 만들면 안 됩니다. 상상을 해서도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사띠를 시작할 때 처음에는 항상 지금 찰라에 일어나는 딱 하나만 잡는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된다 그러면 내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거라. 안 되면 안 되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데 정직하지 못하게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가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냥 '일어남, 사라짐' 하고 명칭에만 붙잡혀서 한 시간 내내 보내버린다는 거라. 그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한다는 거라. 

왜? 그렇게 하면 바른 사띠는 아니라도 어쨌든 사띠는 하고 있으니까 몸과 마음은 고요하거든. 어떤 현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그러니까 편안하니까, 다른 거보다도 잡념도 별로 없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해 나가버립니다. 정직하지 못한 거라. 


사띠가 되는 것은 탐진치가 없어야 만이 사띠가 됩니다. 내가 그 대상에 붙잡혀들어가 버리면 어떤 경우든지 그 마음은 사띠하는 마음이 아니고 도사(진)의 마음이든지 모하(치)의 마음이든지 탐·진·치의 마음으로 하고 있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정직하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아니면 아니다 하고 사띠를 하고, 빨리 사띠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대상 하나만 알아차리는데 또 장애가 되는 것들은 뭐냐 하면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지지 않는 거라. '아! 이건 내가 반드시 할 수 있다.' 하는 마음을 먹어도 될동말동 하는 판에 '이때까지 해보니까 안 되더라.' 안 된다고 그거는 이미 포기해버리고 바른 사띠 하려는 생각은 포기해버리고 그냥 앉아갖고, 어쩔 수 없이 한 시간 앉아있어야 되니까 한시간을 요렇게 하고 있는 거라. 이미 마음으로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시작을 하는데 어떻게 그게 될 거라.

또 '스님 말 들어보니까 십년 하니까 겨우 되드라.' '아이고! 나는 십년동안 안 된다. 스님이 십년 했으면 나는 이 생이 끝날 때까지 해도 안 되는데 이게 어쨌든 바른 길인 거는 같으니까 그냥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항상 실재하는 것들을 보지를 않고 빤냐띠(paññatti)를 봅니다. 개념으로 자꾸 만들어서 하게끔 된다는 거라. 수행은 항상 빠라맛타(paramattha) 입니다. 실재하고 궁극적인 것들을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 꿰뚫어 보는 힘이 생겨나갑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렇게 해서 대상을 잡으면 그 대상에 대해서 그 대상의 움직임과 느낌의 변화를 자세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모양과 형태에 마음을 쏟으면 안 됩니다.


수행의 네 단계는 뭐라 그랬어요? 

먼저 움직임을 알아차려라. 

그리고 그 움직임의 시작과 끝남, 멈춤을 알아차려라. 

그 움직임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앞에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뒤에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분리돼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 그래서 그 움직임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려라. 멈춤을 알아차려라. 

그러고 나서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도를 알아차려라. 움직임은 항상 마음이 앞서서 움직여지는 것이지 마음이 앞서지 않으면 움직임이 없다 하는 거라. 움직임의 시작과 끝을 알아차리면 그걸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러고 나서 해야 되는 것이 뭐라 그랬어요? 

세 번째가 일어나는 느낌들, 사대요소에 대한 현상들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 현상들이 발을 들어올리는 움직임일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리고 그 현상들에 대해서 그 현상이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려라 하는 것이 네 번째 단계라고 그랬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대상을 잡았으면 그 대상의 움직임과 느낌의 변화를 반드시, 자세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배를 관찰하고 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호흡을 사띠하고 있을 때도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경우, 배가 불러오는 움직임 또 꺼지는 움직임 이거는 뭡니까? 위딱까(vitakka 尋) 입니다. 움직임 움직임 움직임 자체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이 위딱까 입니다. 이렇게 일치시키면 어떻게 돼요? 그 움직임을 안다는 거라. 그니까 위딱까가 그 속에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움직임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위딱까가 없는 거라. 


수행의 기본은 위딱까(vitakka 尋)가 먼저 있어야 됩니다. 

대상에 마음을 탁 일치시켜가지고, 거기서 대상에 탁 일치되는 것이 있어야만이 된다는 거라. 그게 위딱까입니다. 일치가 돼야 만이 그 움직임을 알 수가 있는 거고, 일치가 되지 않으면 움직임을 알 수가 없이 모양이나 형태들을 알게끔 된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호흡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아! 어떨 때는 강하고 어떨 때는 약하고' 또 호흡이 시작되었다가 마지막 멈추는 게 있고, 그다음에 호흡을 해나가는데 마음으로 일어난다는 마음이 앞서고 나서 배가 불러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다 아는 것은 위짜라(vicāra 伺)라고 그럽니다. 지속적으로 그 위딱까가 연결이 돼버립니다. 연결되지 못하면 느낌의 변화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라. 그게 두 번째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움직임보다도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움직임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것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느낌의 변화는 위빳사나 수행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오직 불교만의 독특한 수행이라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라고 그럽니다.


위빳사나는 뭡니까?

그 대상에서 무상․고․무아, 무상(aniccā)은 뭡니까? 변화입니다. 변화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변화를 알아차려야 만이 그 속에서 둑카(dukkha)의 성질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러고 아낫따(anattā)의 성질을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그게 이 불교만의 독특한 수행 체계이기 때문에 움직임만 알아차리고는 무상․고․무아로 연결시키기에는 힘이 든다는 거라. 그래서 움직임보다는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는 거라. 

엄밀하게 따지면 움직임도 빤냣띠입니다. 관념적이고,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느낌은 어떤 경우든지 빠라맛타 라는 겁니다.


왜 빤냣띠를 하지말고 빠라맛타를 하라고 합니까? 

빤냣띠는 단순하다는 거라. 변하지 않으니까. 그럼 마음은 쉽게 싫증을 내고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빠라맛타라고 하는 실재하는 것은, 변화되는 것을 보면 재미가 있으니까 계속 따라가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빠라맛타를 하라는 거라. 

움직임은 변화되지를 않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 움직임만 보면 항상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라.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어. 배가 불러오면 '일어남', 배가 꺼지면 '사라짐', 일 분 전에 일어남이나 일 분 후에 일어남이나 똑같다는 거라. 움직임을 해가지고는 마음이 빨리 벗어난다는 거라. 


왜? 실재하는 것들은 변화되는 것인데, 변화되면 마음은 따라갈 수 있는데 변화되지 않으니까 마음이 벗어나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배가 불러올 때 움직임을 완전하게 일치해서 알아차리고 다 안다고 하더라도 배가 일어날 때 어떻게 돼요? 일어나고 나면 반드시 멈춤이 있습니다. 

그 짧은 멈춤 동안에 마음은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벗어나버리니까 잠에 폭 떨어지든지, 아니면 딴 생각을 일으키든지, 다른 대상을 찾게 되든지, 아주 짧은 찰나에 그렇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어느 정도 명확하게 움직임을 인식하고 나서는, 반드시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수행에서 힘이 많이 좀 길러졌으면 느낌을 금방 따라가집니다.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느낌만 알아차리는데도 머리 아픕니다. 산란해집니다. 그러니까 못 따라가는 거라. 못 따라가니까 '아! 이거 아니다' 해갖고 다시 또 움직임으로 돌아가버리는 거라. 그건 맞습니다. 

힘이 없다고 판단될 때는 아직 내가 사띠가 예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느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느낌의 변화를 보면 오히려 더 산란해집니다. 

느낌의 변화를 보는데도 마음이 착 가라앉아가지고 안정되지 못하면 다시 움직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움직임을 봐서, 명확하게 그 움직임에 대해서 마음으로 일치시키고 나서, 그러고 나서 다시 움직임을 보는 것이 합당한 겁니다. 무조건 스님이 느낌의 변화를 보라니까 마음이 안정돼있지도 않은데 그것만 볼라고 이래 하다보면 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 호흡이나 또 경행을 할 때 먼저 배의 움직임, 그리고 발의 움직임을 먼저 봐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먼저 안정을 시키는 겁니다. 

안정을 시키고 나서 느낌의 변화를 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또한 느낌의 변화를 보기 시작했으면 그것을 다 따라잡고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직은 그런 단계가 안됐다는 거라. 그러면은 하나라도, 하나라도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 하나만 봐도 돼. 그 하나만 봐도 그 속에서 무상․고․무아 충분히 인식을 해나간다는 거라. 


다 따라가서 느낌의 변화를 다 볼려고 하니까 어떻게 돼요? 발걸음도 너무나 느려지는 거라. 너무나 느려지니까 실재하는 것을 보는 것에서 다시 또 그냥 빤냐띠로 흘러가버리는 거라.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면 그건 크게 효과가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아는 것보다도 더 좋습니다. 그래야 그 하나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게 이번에는 두 개가 되고, 그다음에는 세 개가 되고 이렇게 자꾸 늘어나게 된다는 거라. 

하나를 봤다고 해서 더 많은 걸 욕심을 내다보면 자꾸 호흡이든지 발걸음이 빤냣띠 쪽으로 쏠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힘이 생기고 나면, 사띠의 힘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계속되고, 그 궁극적인 성품을 알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사띠를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걸 놓치지 않아야 되느냐 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작하는 것과 끝나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시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끝나는 것은 대부분 놓쳐버린다는 거라. 

끝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만이 거기에 멈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멈춘다는 사실을 알아야 만이 구분할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움직임도 구분하게 되고 느낌도 변화되는 것을 구분하게 되는데 그걸 못한다는 거라.


왜 그렇게 끝나는 부분을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하면 

노력의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위리야(virya)가 없기 때문에 그런 끝나는 부분을 명확하게 인식을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 대상에 착 달라붙지 못하고 산란해집니다. 

그럴 때는 걷고 있으면 경행하는 것을 딱 중단하고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다. 일어나는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 내가 '요시 해보자' 하는 탐심을 가지고 지금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수행이 잘 안 된다고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어리석게 그냥 하고 있는가? 내 지금 일어나는 마음을 먼저 보도록 하라.

보고 나서 다시 의도를 내서 움직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반드시 어떤 대상이든 하나가 일어났으면 그것은 멈추게 돼있습니다. 끝나게 돼있습니다. 그래야 다음 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반드시 끝나는 것들을 자꾸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이 수행을 하다 보면 반드시 여러분들은 그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확신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스님이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하면 내가 이 끝나는 것들은 알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가져라는 거라. 그런 확신들이 위리야를 일으키게끔 합니다. 

그렇다고 확신을 가진다고 해가지고 '음! 나는 반드시 볼거야!'하고 마음을 먹어버리면 그건 이미 탐심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런 탐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언제가 돼도 나에게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거라. 지금은 안 될지 몰라도 자연스럽게 하다 보면 반드시 멈추는 상태를 알 것이다 하고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는다는 마음을 내어라는 거라.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노력하는 힘들이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부처님 법을 자꾸 듣고 그리고 보도록 해라. 보고 듣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확인이 돼야 만이 내가 확신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확신들로 인해서 더 노력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화요일 하고 목요일은 빼먹지 말아라는 거라. 스님 법문 재미없습니다. 재미없어도 들어라는 거라. 듣고 또 듣고 자꾸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신심을 일으키고, 신심으로 인해서 노력하는 것들이 저절로 자꾸 생겨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지막 멈추는 상태를 볼 수가 없을 때는

계속 호흡을 볼려고 하지 말고 딱 중단을 하고 그때 일어나는 마음을 먼저 냉정하고 확실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마음이 편안한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되고 나서 다시 호흡이든 아니면 경행을 하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호흡이든 경행에서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을 모르면 그것을 자꾸 볼려고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볼려고 애쓰게 되면 당연히 긴장을 하게 됩니다. 긴장하게 되면 실재적인 것은 관찰하기가 자꾸 더 힘들어진다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고 대상에 착 달라붙도록 돼야 만이 그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대상의 두 번째 단계에 달라붙질 못한다는 거라. 자연스럽게 호흡이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마음속으로 항상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걸을 때는 걷는 것뿐이다. 호흡할 때는 호흡하는 것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볼 때는 보는 것뿐이고, 들을 때는 듣는 것뿐이고, 듣고 나서 '아! 법문 좋다' 그런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그냥 들어라는 거라. 냄새 맡을 때는 냄새 맡는 것뿐이라는 거라.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뿐이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분별심을 절대 일으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해라는 거라.


수행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남이 잘못한다고 해가지고 '저 사람은 왜 경행을 저리 하나?' 그런 마음조차도 일으키지 말아라. 남의 허물은 남의 허물일 뿐이라. 내꺼 아니라. 남이 뭐라고 아무리 나에게 화를 내더라도 그냥 들리는 것뿐이라. 그렇게 자꾸 수행을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대상에 달라붙게 되는 거라. 

대상은 항상 붙잡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배척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대상 자체가 대상 자체에 마음을 일치시키는 첫 번째 단계를 반드시 해야 되고. 그래서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고. 

그 움직임이 분명하게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시작과 중간과 끝나는 부분에 마음을 일치시켜주도록 자꾸 노력해야 되고. 그리고 그 대상은 반드시 멈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돼야 만이 진짜 사띠를 지속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야 느낌의 변화, 느낌을 알아차려나가게 됩니다. 

대부분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수행하다가 망상을 한다든지 잠에 떨어진다든지 아니면, 실재적인 게 아니고 관념적인 것으로 빠지게끔 되는 겁니다. 

이것을 항상 명심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사띠의 부분에 대한 것을 더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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