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먼 길을 걸어서 오다가 결국은 죽어버렸는데, 그 여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젊은이가 그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움에 빠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그 여성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욕망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불행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라는 뜻으로 얘기해서, 이 욕구-감각적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의존하는 것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명이 아깝다고 할 거 같으면, 날으는 동물들도 주변에 새들이 공격해오면 아무리 맛있는 고기토막이라도 내버려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욕망은 고기토막과 같은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버려버려야 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단순하게 일어나는 그런 욕망뿐 아니라 아이를 기르는 것, 또 함께 장사하는 것들, 또 집을 지키는 것들, 그다음에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다 악이 되지 않는 것이지만 다 까마(kāma)에 들어갑니다. 정상적인 욕구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들도 의존을 하게 되면 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감각적인 욕망들을 잘 이해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사회에서는 서로 협력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에 들어갑니다.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것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협력하면서 집착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회를 산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만을 신경써서 산다는 것은 올바른 길은 아닙니다. 우선 본인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눈이 안 보이는 장님 두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더라도 그것은 바른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틀릴 수밖에 없는 부분들입니다.
우선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해 주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신을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설혹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관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기 관찰을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해야 되지? 하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실수를 범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비난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입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판할 때 즐거워야 됩니다. 그런데 비판되었다고 좋아하는 인간은 없죠?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관찰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관찰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에게는 우유부단한 것들이나 오만한 것들이나 화내는 것들이나 미움이나 질투 게으름 같은 것들이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남에게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은 좀처럼 눈에 띄질 않습니다. 자신이 완벽하다, 올바르다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찰하도록 해서 그렇게 관찰을 하다 보면 '아! 내가 이런 부분은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고 용기가 있게 되어서, 더욱더 스스로를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관찰하면 자기 자신이 보여지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두 가지의 결과가 생겨나올 수가 있습니다.
근성이 없는 사람은 하다가 자기관찰을 멈추어 버립니다.
그런데 용기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관찰을 계속하게 됩니다.
굴하지 않고 반복해서 관찰하다 보면 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단점을 관찰하게 되어서 스스로 고치게 되기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한 사람은 곧 얼마 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인간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스스로 서서히 자신의 마음의 상태나 기분을 알게 되므로 다른 사람의 기분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 상대를 좇아가고, 또 자기 자신이 올바르다고 나와 남을 속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좇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은 도망쳐버리게 됩니다.
올바른 방법은 자신의 마음의 힘에 이끌려서 모여오는 것들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실라 닷사나 삼빤나(sīla dassana sampan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에 근거하는 계율'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이해해서 바른 도덕적인 행위들을 행해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리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돼있습니다.
더욱더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찰해나가다 보면 마음의 기능이 보여집니다.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어내도 그 원인이 보여옵니다.
또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도 같은 법칙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영원불멸하다, 전혀 변함없다 하는 자아, 그러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인연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은 순간적이나마 해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말한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은 그럴 때 태양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태양은 지구상에 있는 어떤 생명에게도 사랑 받을려고도 하지 않고, 욕구를 가지려고도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상의 어떤 생명들도 태양의 덕분으로, 태양의 힘으로, 태양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돼야 됩니다.
경전에 '앗따노 깜마 꿉바낭 땅 자노 꾸루떼 삐양(attano kamma kubbānaṃ taṃ jano kurute piyaṃ)'이라고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을 다 이루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다' 하는 얘깁니다.
여러분들도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 이와 같이 행하고 실천해나가야 될 것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물에다가 여러 가지 물감을 풀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물은 자신의 얼굴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이와 같이 일어난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게 돼서 왜곡시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감각적인 욕망도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다섯 가지 장애) 두 번째 악의(byāpāda)를 알아차린다 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관찰은 앞의 감각적인 욕망과 반대되는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악의라고 하는 것은! 분노입니다. 분노! 도사(dosa)!
자신이 만난 대상을 싫다 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밖의 대상을 만날 때 그 만난 대상에 대해서 그것은 싫다 라고 생각하는 기분, 그것이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가 커지면 파괴적인 감정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부수고 싶고, 비판하고 싶고, 불평하고 싶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설교하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지당할 거 같은데 선악의 기준을 붙여서 사람들에게 설교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자신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 역시 마음의 분노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나는 대상에 대해서 거부하는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시간으로 하면 아홉시까지 다들 와야 된다 할 거 같으면, 교장 선생님이 출석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선생님들의 출석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여덟 시 반에, 어떤 선생님은 여덟 시 오십 분에 오면 자기가 그 기록을 하고 사인을 하게끔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정확하게 아홉 시가 되면 교장 선생님이 거기에다가 사인을 하고 나서 붉은 줄을 딱 그어버립니다. 그럼 아홉 시 넘어서 오는 선생님들은 그 붉은 줄 밑에 기록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또 어떤 학교에서는 똑같이 그렇게 기록을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 본인은 아홉 시 이전에 등교를 했지만 기록하는 것은 한참 뒤 아홉 시 반이나 되어서 기록을 하고 사인을 합니다.
앞의 경우는 분명하게 맞는 얘깁니다. 또 뒤의 교장 선생님은 지각해도 괜찮다 하고 말하는 것은 또 아닐 겁니다. 단지 뒤에 있는 교장 선생님은 사람들을 너그럽게 봐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일찍 오더라도 한 삼십 분 늦게 그것을 기록을 하는 것뿐입니다.
앞의 교장 선생님과 같이 엄격한 사람들은 완벽주의라고 판단들을 하는데 사실은 완벽주의는 아닙니다. 다만 분노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거부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가득할 뿐입니다.
결국은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의 학업성취 이런 것들이 뒤의 교장 선생님이 있는 곳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일례로써 태국 교육청에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악의, 분노라고 하는 성격이 있으면 행복한 세계가 보이지 않고, 나쁜 것만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성격 중에서 자신이 훌륭한 것처럼 느끼거나 사람의 결점만을 보는 것이 느껴진다고 깨달으면 이것은 고쳐야 됩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이니까!
또한 이런 악의나 분노가 일어나면 몸도 변화해서 망가져 버립니다.
경전에 의지가 일어나면 몸의 물질은 전부 변화한다 하고 부처님이 가르쳤습니다. 우리 마음 상태에 따라서 몸도 그렇게 변화합니다. 화내면 분노에 어울리는 것이 일어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면 자애에 어울리는 것이 완성되어 나갑니다. 몸에 나쁜 독소를 만들어내면 그 나쁜 독소로 인해서 몸을 파괴해버리게 됩니다.
이런 악의나 분노를 고치는 방법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버리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불완전하며 자신도 불완전하다 라고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인정해줘 버리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하나하나의 동작에 '사띠(sati)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라고 합니다. 사띠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본래 자신의 성격과 관계없이 어떤 성격이라도 바른 성격으로 방향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르게 변화되게 돼있습니다.
이런 악의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내가 쇼크를 받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악의나 질투가 일어났을 경우는 자신을 비참하게 느껴버리거나 불행하게 느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또한 분노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자기 파괴의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돌리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잇사(issā)라고 하는 질투의 반대말은 무디따(muditā)라고 합니다. 기쁨입니다. 그래서 자비희사-사무량심에 대한 수행법에서 무디따에 대한 게송으로써 기쁨을 충족시키도록 자꾸 노력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지기를' 하고 바라는 것이 무디따입니다.
어떤 것이 무디따냐 하면 예를 들어서 한국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한국 사람 모두가 기뻐합니다. 그런 느낌이 무디따 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즐거워 해주고 하는 것들, 인색함이 없이 기뻐해 주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또한 질투의 마음을 없앨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싫다고 하는 마음조차도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런 것은 맛차리야(macchariya)라고 해서 인색함입니다. 인색하게 되면 또한 사람이 불행하게 됩니다. 아무리 큰 저택이 있다 하더라도 경비보안 시스템을 아무리 잘해놓고 해도, 그래서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할 거 같으면 그 저택은 도깨비 저택이 되어버립니다. 불행하게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인색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와 공유한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나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이 분노의 종류들인데, 분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밖으로 향하는 분노입니다.
안으로 향하는 분노라는 것은 불평 불만하는 것이나 낙담하고 고민하는 것이나 자기혐오, 비하 이런 것들은 안으로 향한 분노라고 그럽니다.
밖으로 향한 분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화내고 싫은 마음이 드는 것, 자신이 화낸 원인이나 싫은 원인이 또한 낙담한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 때문이다' 밖에 있다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들이 밖으로 향하는 분노입니다.
예를 들어서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갔는데 마실 음료수가 마침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아! 참 왜 이렇지? 난 항상 이렇다. 내가 갈 때만 되면 그 음료수가 항상 떨어지는구나'하고 낙담해버리는 성격, 그런 사람은 안으로 향하는 분노입니다.
그런데 주인에게 "떨어졌으면 빨리빨리 갔다놔야지 24시간 편의점이 왜 필요하냐" 하면서 싫은 기분이 되는 사람은 밖으로 향한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둘 다 분노는 분노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향해 화내는 사람은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 느끼고 있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 탓은 아니다. 나는 항상 올바르다'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계발시킬려고, 능력을 향상시킬려고, 보다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를 않게 됩니다. 그러한 잠재의식은 완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다른 사람의 결점만을 볼려고 하게 됩니다.
또한 안으로 화내는 사람은 자기파괴력이 굉장히 급속합니다. 매우 어둡게 됩니다. 실행할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도전하려는 자세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미 몸에 붙어있는 능력조차도 점점 더 줄어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을 향해 공격적이 되므로 사는 것이 매우 괴롭게 됩니다. 그 괴로움이 인내의 한도를 넘어서버리면 폭력적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해서 자살을 꾀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자기 파괴입니다.
안으로 향한 분노나 밖으로 향한 분노나 똑같이 자기 파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이러한 분노는 원인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마나(māna)라고 그럽니다. 아만(我慢), 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띠마나(atimāna)'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
나는 아무래도 안 돼 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히나 마나(hinamāna)'라고 그럽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 똑같다,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자의식도 있습니다. 이것을 '사디사 마나(sadisamāna)'라고 그럽니다. 동등하다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 동등아만의 사람은 그렇게 분별하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럽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야 되는 것은, 감기는 중병은 아닙니다. 그런데 폐렴은 중병입니다. 감기를 악화시키면 폐렴으로도 됩니다. 이 동등아만의 사람도 다른 사람이 차별하는 것들을 보면, 특히 자기 자신을 경시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버립니다. 이것도 꼭 마찬가지로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띠마나, 히나마나, 사디사마나 똑같이 아만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분노는 이러한 마나가 원인이 되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분노를 완전하게 퇴치하기 위해서는 이런 아만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혜롭게 자신을 관찰하여서 변하지 않는 자신이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순간순간 생멸하고 변하고 있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의식도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고, 실체라고 하는 '나'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도 영원불멸하는 것이 없다 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만이 아만을 없앨 수 있는 방법입니다.
분노를 사람들은 가볍게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HIV'와 같습니다. 바이러스와 같다 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어떤 때는 발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발병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바이러스가 잠재해 있으면 어떤 계기로 인해서 그 바이러스는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폭발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HIV'와 같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것들입니다.
당장 없앨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의 단계에서 성인의 단계 중에서 세 번째 단계에 이르지 않은 분은 이 분노나 욕구는 항상 따라다니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하의 사람들은 항상 욕구를 가지고,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류과를 깨달을 사람도 성자의 일원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욕구와 분노에 빠져서 죄를 범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욕구와 분노는 있지만 욕구와 분노가 지혜라고 하는 것에 인해서 공격받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숨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발병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완전하게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뿐인 것이지 외부적으로는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족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열 가지 족쇄를 얘기합니다.
깨닫고 싶다. 돈을 갖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싶다. 병이 들고 싶지 않고 죽고 싶지 않다 하는 이런 감정들입니다. 이것들은 족쇄라고 얘기합니다. 뭐 그렇게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 건데도 이러한 감정들은 사람을 괴로움으로 속박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성자는 이 열 가지 족쇄를 찢어버리고 완전하게 자유롭다 하는 뜻입니다.
붓다(Buddha)는 나마와 루빠에 걸릴 것이 없습니다.
나마(nāma)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마음입니다. 감정·망상·사고·개념 이런 것입니다. 부처님(Buddha)은 자신의 감정이나 망상이나 개념 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버려버렸습니다. 또한 세상의 사고와 감정 등에도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루빠(rūpa)라는 것은 물질입니다. 자신의 육체도 물질입니다. 밖의 것도 물질입니다. 물질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이라서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마음에도 물질에도 일절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를 획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완전하게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런 존재, 나마와 루빠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분노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옷에 실제로 불이 붙은 것이다' 하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분노를 방치하면 옷도 타고 자신도 타들어 갑니다.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분노가 폭발하면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폐를 끼치게 됩니다.
분노에 지는 사람은 이 세상만 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도 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이성이 없어져 버립니다. 사물이 안 보이게 돼서 분노의 감정이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주도권을 잡는 것이 '나'가 아니라 '분노'인 것입니다. 분노에 억압되어서 생각하는 일도, 말하는 행위도, 또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파괴해버리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 무섭다.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고 할 거 같으면 분노가 이와 같이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분노를 약화시켜야 됩니다.
경전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수행하러 숲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살려고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자르는데, 어느 나무에 수신(樹神)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수신은 그 나무가 잘려지고 나면 자기 자신은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방해를 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 스님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스님이 도끼를 내리쳐서 나무를 자르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의 손을 갖다 대게끔 합니다. 결국 나무를 자르려다가 다른 사람의 손이 절단돼버리게 됩니다.
이 수신이 굉장히 화가 나서 그 비구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려고 하다가 순간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 스님을 죽여버리면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는 출가자를 죽여버리는 것이 되어서 큰 죄를 짓게 된다. 내가 만약에 이런 결과를 만들면 또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만들 수가 있다. 이렇게 다른 출가자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니까 이래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고, 부처님한테 가서 호소를 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분노를 참고 부처님한테 가서 울면서 이 사건을 얘기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너는 순간에 일어난 격렬한 분노를 잘 관리했다. 누구든지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너는 참으로 잘했구나" 하는 칭찬을 해주면서 그 수신을 기원정사의 다른 좋은 나무에 거주처를 주게 됩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서 도움 되라고 하는 얘깁니다.
* 기초수행23. 법념처4. 오장애_악의 (20080226)
오늘 이 시간에도 법념처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유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먼 길을 걸어서 오다가 결국은 죽어버렸는데, 그 여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젊은이가 그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움에 빠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번도 그 여성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욕망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불행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라는 뜻으로 얘기해서, 이 욕구-감각적인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의존하는 것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명이 아깝다고 할 거 같으면, 날으는 동물들도 주변에 새들이 공격해오면 아무리 맛있는 고기토막이라도 내버려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욕망은 고기토막과 같은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버려버려야 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단순하게 일어나는 그런 욕망뿐 아니라 아이를 기르는 것, 또 함께 장사하는 것들, 또 집을 지키는 것들, 그다음에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다 악이 되지 않는 것이지만 다 까마(kāma)에 들어갑니다. 정상적인 욕구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들도 의존을 하게 되면 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감각적인 욕망들을 잘 이해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사회에서는 서로 협력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에 들어갑니다.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것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협력하면서 집착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회를 산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만을 신경써서 산다는 것은 올바른 길은 아닙니다. 우선 본인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눈이 안 보이는 장님 두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더라도 그것은 바른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틀릴 수밖에 없는 부분들입니다.
우선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해 주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신을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설혹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관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기 관찰을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해야 되지? 하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항상 올바르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실수를 범했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비난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런 것 때문입니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판할 때 즐거워야 됩니다. 그런데 비판되었다고 좋아하는 인간은 없죠?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관찰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관찰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에게는 우유부단한 것들이나 오만한 것들이나 화내는 것들이나 미움이나 질투 게으름 같은 것들이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남에게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은 좀처럼 눈에 띄질 않습니다. 자신이 완벽하다, 올바르다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찰하도록 해서 그렇게 관찰을 하다 보면 '아! 내가 이런 부분은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고 용기가 있게 되어서, 더욱더 스스로를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관찰하면 자기 자신이 보여지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두 가지의 결과가 생겨나올 수가 있습니다.
근성이 없는 사람은 하다가 자기관찰을 멈추어 버립니다.
그런데 용기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관찰을 계속하게 됩니다.
굴하지 않고 반복해서 관찰하다 보면 보다 선명하게 자신의 단점을 관찰하게 되어서 스스로 고치게 되기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한 사람은 곧 얼마 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인간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스스로 서서히 자신의 마음의 상태나 기분을 알게 되므로 다른 사람의 기분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 상대를 좇아가고, 또 자기 자신이 올바르다고 나와 남을 속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좇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은 도망쳐버리게 됩니다.
올바른 방법은 자신의 마음의 힘에 이끌려서 모여오는 것들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실라 닷사나 삼빤나(sīla dassana sampanna)'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에 근거하는 계율'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이해해서 바른 도덕적인 행위들을 행해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리 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돼있습니다.
더욱더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찰해나가다 보면 마음의 기능이 보여집니다.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어내도 그 원인이 보여옵니다.
또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도 같은 법칙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영원불멸하다, 전혀 변함없다 하는 자아, 그러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인연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은 순간적이나마 해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말한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마음은 그럴 때 태양과 같이 빛나게 됩니다. 태양은 지구상에 있는 어떤 생명에게도 사랑 받을려고도 하지 않고, 욕구를 가지려고도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상의 어떤 생명들도 태양의 덕분으로, 태양의 힘으로, 태양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돼야 됩니다.
경전에 '앗따노 깜마 꿉바낭 땅 자노 꾸루떼 삐양(attano kamma kubbānaṃ taṃ jano kurute piyaṃ)'이라고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을 다 이루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다' 하는 얘깁니다.
여러분들도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날 때 이와 같이 행하고 실천해나가야 될 것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물에다가 여러 가지 물감을 풀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물은 자신의 얼굴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이와 같이 일어난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게 돼서 왜곡시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감각적인 욕망도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다섯 가지 장애) 두 번째 악의(byāpāda)를 알아차린다 하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관찰은 앞의 감각적인 욕망과 반대되는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악의라고 하는 것은! 분노입니다. 분노! 도사(dosa)!
자신이 만난 대상을 싫다 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밖의 대상을 만날 때 그 만난 대상에 대해서 그것은 싫다 라고 생각하는 기분, 그것이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가 커지면 파괴적인 감정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부수고 싶고, 비판하고 싶고, 불평하고 싶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설교하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지당할 거 같은데 선악의 기준을 붙여서 사람들에게 설교해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자신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 역시 마음의 분노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나는 대상에 대해서 거부하는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우리 시간으로 하면 아홉시까지 다들 와야 된다 할 거 같으면, 교장 선생님이 출석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선생님들의 출석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선생님은 여덟 시 반에, 어떤 선생님은 여덟 시 오십 분에 오면 자기가 그 기록을 하고 사인을 하게끔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정확하게 아홉 시가 되면 교장 선생님이 거기에다가 사인을 하고 나서 붉은 줄을 딱 그어버립니다. 그럼 아홉 시 넘어서 오는 선생님들은 그 붉은 줄 밑에 기록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또 어떤 학교에서는 똑같이 그렇게 기록을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 본인은 아홉 시 이전에 등교를 했지만 기록하는 것은 한참 뒤 아홉 시 반이나 되어서 기록을 하고 사인을 합니다.
앞의 경우는 분명하게 맞는 얘깁니다. 또 뒤의 교장 선생님은 지각해도 괜찮다 하고 말하는 것은 또 아닐 겁니다. 단지 뒤에 있는 교장 선생님은 사람들을 너그럽게 봐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일찍 오더라도 한 삼십 분 늦게 그것을 기록을 하는 것뿐입니다.
앞의 교장 선생님과 같이 엄격한 사람들은 완벽주의라고 판단들을 하는데 사실은 완벽주의는 아닙니다. 다만 분노의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거부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가득할 뿐입니다.
결국은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의 학업성취 이런 것들이 뒤의 교장 선생님이 있는 곳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일례로써 태국 교육청에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악의, 분노라고 하는 성격이 있으면 행복한 세계가 보이지 않고, 나쁜 것만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성격 중에서 자신이 훌륭한 것처럼 느끼거나 사람의 결점만을 보는 것이 느껴진다고 깨달으면 이것은 고쳐야 됩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이니까!
또한 이런 악의나 분노가 일어나면 몸도 변화해서 망가져 버립니다.
경전에 의지가 일어나면 몸의 물질은 전부 변화한다 하고 부처님이 가르쳤습니다. 우리 마음 상태에 따라서 몸도 그렇게 변화합니다. 화내면 분노에 어울리는 것이 일어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면 자애에 어울리는 것이 완성되어 나갑니다. 몸에 나쁜 독소를 만들어내면 그 나쁜 독소로 인해서 몸을 파괴해버리게 됩니다.
이런 악의나 분노를 고치는 방법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버리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불완전하며 자신도 불완전하다 라고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인정해줘 버리면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하나하나의 동작에 '사띠(sati)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라고 합니다. 사띠 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본래 자신의 성격과 관계없이 어떤 성격이라도 바른 성격으로 방향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르게 변화되게 돼있습니다.
이런 악의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내가 쇼크를 받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악의나 질투가 일어났을 경우는 자신을 비참하게 느껴버리거나 불행하게 느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또한 분노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질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자기 파괴의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돌리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잇사(issā)라고 하는 질투의 반대말은 무디따(muditā)라고 합니다. 기쁨입니다. 그래서 자비희사-사무량심에 대한 수행법에서 무디따에 대한 게송으로써 기쁨을 충족시키도록 자꾸 노력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원하는 것이 이루지기를' 하고 바라는 것이 무디따입니다.
어떤 것이 무디따냐 하면 예를 들어서 한국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한국 사람 모두가 기뻐합니다. 그런 느낌이 무디따 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즐거워 해주고 하는 것들, 인색함이 없이 기뻐해 주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또한 질투의 마음을 없앨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싫다고 하는 마음조차도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런 것은 맛차리야(macchariya)라고 해서 인색함입니다. 인색하게 되면 또한 사람이 불행하게 됩니다. 아무리 큰 저택이 있다 하더라도 경비보안 시스템을 아무리 잘해놓고 해도, 그래서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할 거 같으면 그 저택은 도깨비 저택이 되어버립니다. 불행하게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인색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와 공유한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나의 것은 공동의 것이고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이 분노의 종류들인데, 분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밖으로 향하는 분노입니다.
안으로 향하는 분노라는 것은 불평 불만하는 것이나 낙담하고 고민하는 것이나 자기혐오, 비하 이런 것들은 안으로 향한 분노라고 그럽니다.
밖으로 향한 분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화내고 싫은 마음이 드는 것, 자신이 화낸 원인이나 싫은 원인이 또한 낙담한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 때문이다' 밖에 있다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들이 밖으로 향하는 분노입니다.
예를 들어서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갔는데 마실 음료수가 마침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아! 참 왜 이렇지? 난 항상 이렇다. 내가 갈 때만 되면 그 음료수가 항상 떨어지는구나'하고 낙담해버리는 성격, 그런 사람은 안으로 향하는 분노입니다.
그런데 주인에게 "떨어졌으면 빨리빨리 갔다놔야지 24시간 편의점이 왜 필요하냐" 하면서 싫은 기분이 되는 사람은 밖으로 향한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둘 다 분노는 분노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향해 화내는 사람은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 느끼고 있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 탓은 아니다. 나는 항상 올바르다'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계발시킬려고, 능력을 향상시킬려고, 보다 좋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지를 않게 됩니다. 그러한 잠재의식은 완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다른 사람의 결점만을 볼려고 하게 됩니다.
또한 안으로 화내는 사람은 자기파괴력이 굉장히 급속합니다. 매우 어둡게 됩니다. 실행할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도전하려는 자세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미 몸에 붙어있는 능력조차도 점점 더 줄어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을 향해 공격적이 되므로 사는 것이 매우 괴롭게 됩니다. 그 괴로움이 인내의 한도를 넘어서버리면 폭력적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해서 자살을 꾀하기도 하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자기 파괴입니다.
안으로 향한 분노나 밖으로 향한 분노나 똑같이 자기 파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이러한 분노는 원인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마나(māna)라고 그럽니다. 아만(我慢), 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띠마나(atimāna)'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높다고 판단하는 것.
나는 아무래도 안 돼 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히나 마나(hinamāna)'라고 그럽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 똑같다,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자의식도 있습니다. 이것을 '사디사 마나(sadisamāna)'라고 그럽니다. 동등하다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 동등아만의 사람은 그렇게 분별하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럽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야 되는 것은, 감기는 중병은 아닙니다. 그런데 폐렴은 중병입니다. 감기를 악화시키면 폐렴으로도 됩니다. 이 동등아만의 사람도 다른 사람이 차별하는 것들을 보면, 특히 자기 자신을 경시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내버립니다. 이것도 꼭 마찬가지로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띠마나, 히나마나, 사디사마나 똑같이 아만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분노는 이러한 마나가 원인이 되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분노를 완전하게 퇴치하기 위해서는 이런 아만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혜롭게 자신을 관찰하여서 변하지 않는 자신이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순간순간 생멸하고 변하고 있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의식도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고, 실체라고 하는 '나'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도 영원불멸하는 것이 없다 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만이 아만을 없앨 수 있는 방법입니다.
분노를 사람들은 가볍게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HIV'와 같습니다. 바이러스와 같다 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어떤 때는 발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발병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바이러스가 잠재해 있으면 어떤 계기로 인해서 그 바이러스는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폭발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HIV'와 같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것들입니다.
당장 없앨 수는 없습니다.
깨달음의 단계에서 성인의 단계 중에서 세 번째 단계에 이르지 않은 분은 이 분노나 욕구는 항상 따라다니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하의 사람들은 항상 욕구를 가지고,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류과를 깨달을 사람도 성자의 일원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욕구와 분노에 빠져서 죄를 범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욕구와 분노는 있지만 욕구와 분노가 지혜라고 하는 것에 인해서 공격받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숨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발병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완전하게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뿐인 것이지 외부적으로는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족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열 가지 족쇄를 얘기합니다.
깨닫고 싶다. 돈을 갖고 싶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싶다. 병이 들고 싶지 않고 죽고 싶지 않다 하는 이런 감정들입니다. 이것들은 족쇄라고 얘기합니다. 뭐 그렇게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 건데도 이러한 감정들은 사람을 괴로움으로 속박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성자는 이 열 가지 족쇄를 찢어버리고 완전하게 자유롭다 하는 뜻입니다.
붓다(Buddha)는 나마와 루빠에 걸릴 것이 없습니다.
나마(nāma)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마음입니다. 감정·망상·사고·개념 이런 것입니다. 부처님(Buddha)은 자신의 감정이나 망상이나 개념 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버려버렸습니다. 또한 세상의 사고와 감정 등에도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루빠(rūpa)라는 것은 물질입니다. 자신의 육체도 물질입니다. 밖의 것도 물질입니다. 물질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이라서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마음에도 물질에도 일절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에도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를 획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완전하게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런 존재, 나마와 루빠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분노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옷에 실제로 불이 붙은 것이다' 하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분노를 방치하면 옷도 타고 자신도 타들어 갑니다.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분노가 폭발하면 자신뿐 아니라 주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폐를 끼치게 됩니다.
분노에 지는 사람은 이 세상만 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상도 지게 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이성이 없어져 버립니다. 사물이 안 보이게 돼서 분노의 감정이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주도권을 잡는 것이 '나'가 아니라 '분노'인 것입니다. 분노에 억압되어서 생각하는 일도, 말하는 행위도, 또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파괴해버리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 무섭다.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고 할 거 같으면 분노가 이와 같이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분노를 약화시켜야 됩니다.
경전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수행하러 숲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오두막을 짓고 살려고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자르는데, 어느 나무에 수신(樹神)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수신은 그 나무가 잘려지고 나면 자기 자신은 살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방해를 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 스님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스님이 도끼를 내리쳐서 나무를 자르는데 거기에 다른 사람의 손을 갖다 대게끔 합니다. 결국 나무를 자르려다가 다른 사람의 손이 절단돼버리게 됩니다.
이 수신이 굉장히 화가 나서 그 비구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려고 하다가 순간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 스님을 죽여버리면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는 출가자를 죽여버리는 것이 되어서 큰 죄를 짓게 된다. 내가 만약에 이런 결과를 만들면 또 다른 사람들도 이런 일을 만들 수가 있다. 이렇게 다른 출가자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니까 이래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고, 부처님한테 가서 호소를 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분노를 참고 부처님한테 가서 울면서 이 사건을 얘기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너는 순간에 일어난 격렬한 분노를 잘 관리했다. 누구든지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너는 참으로 잘했구나" 하는 칭찬을 해주면서 그 수신을 기원정사의 다른 좋은 나무에 거주처를 주게 됩니다.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서 도움 되라고 하는 얘깁니다.
분노는 다스려나가야 되는 것들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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