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법문


기초수행10. 느낌관찰2 (20071113)

사깜마
2024-09-21
조회수 79


* 기초수행10. 느낌관찰2 (20071113)


그 부분은 꼭 한 번 더 읽어보아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담마스쿨을 안 하고 있지만, 원하면 내가 그 교재들을 지금 쭉 내줄 겁니다. 내주면 그냥 읽어보지 말고 한번 스크랩을 해놔 놨다가 나중에 그렇게 되면 하나 책이 될 겁니다. 책이 되면 설혹 여기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도 내가 마음이 좀 흔들리고 그럴 때는 유용하게 작용들을 할 겁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되겠다는, 수행해야 되겠다는 생각들을 일으켜 주기도 할 겁니다.


단순히 그냥 교리를 배울 거 같으면 그냥 있는 책들,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참고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꼭 한 번씩 더 읽어보고, 지금은 너무 쉽게 적어놨다 해서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게 쉬운 것이 오히려 수행하는 데는 더 훨씬 도움이 될 경우들이 많을 겁니다. 

그렇게 좀 해주시고, 그리고 프린트물 가끔씩 나가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그것도 스크랩을 해놓았다가 나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지금 느낌에 대한 관찰 부분에서 과연 어떤 것이 느낌이기에 우리가 느낌을 관찰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저번 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저번 시간에. 음?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점에 대해서 얘기를 했죠! 그 차이가 단편적으로 얘기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딱 하나만 들으라고 할 거 같으면 감각! 느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볼까요. 

죽은 사람은 느낌이 없으니까 당연히 아픈 걸 모르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픔을 느끼고 있죠. 이 아픔을 느끼는 거는 누가 느끼는 겁니까? 여러분들 몸이 느끼는 겁니까, 마음이 느끼는 겁니까? 몸이 아프니까 마음이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수(受)라고 하는 것은 오온(五蘊)으로 치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그러죠. 색은 물질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렇죠. 그러면 느낌이라는 수는 어디 작용입니까? 마음의 작용이죠!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첫 단추가 느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거기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들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다 그러죠. 모든 것은 마음이라 그럽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까도 예를 들었지만 괴로움, 고통이란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있고 정신적인 고통이 있지만 실제로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음이 영향을 미치는 거죠! 육체적인 고통이 여러분들한테 영향을 미치는 거 아니죠!

여러분들이 의식을 안 할 거 같으면 육체적인 고통은 영향을 못 미칩니다. 수술할 때 어떻게 합니까? 마취제 놓고 하죠. 고통은 있지만 여러분들 느낍니까? 못 느끼죠. 통증 완화제 놓으면 못 느낍니다. 그럼 결국은 뭡니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고 안 느끼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은 확실히 정신적인 부분이죠! 육체적인 부분 아니죠! 그거는 이해를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조용하게 좌선을 하고 하면서 스님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느낌에 대한 것들, 느낌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들을 마무리를 짓고, 그다음 시간에는 느낌에 대한 관찰 부분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는 느낌으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감각이 제 기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살아있다고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감각을 느끼는 곳은 우리 몸에는 통상적으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다섯 군데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각기관'이다 그렇게 부릅니다. 물론 의(意)라 해서 마음도 있지만 마음은 굉장히 미묘하고 잡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에 감각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으로 인해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귀에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소리를 접하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안이비설신'이라고 하는 다섯 군데는 느낌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느낌이 일어나지만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만약에 배가 고픈데 밥을 먹지 않으면 몸에서는 다른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배고프다는 느낌이죠. 싫은 느낌들, 또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들. 영양분이 들어가야 만이 몸이 유지가 되는데, 이것은 엄밀하게 얘기하면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느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 것이고 또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갈망, 갈애가 기능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감각,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을 한번 잘 살펴보면 내가 손을 들어서 만약에 컵을 잡고 입으로 가져와서 물을 마신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눈을 감고도 손을 뻗어서 컵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왜 잡힙니까? 왜 잡히는 걸 압니까? 느낌이 있기 때문에 '아! 컵이구나' 하고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컵을 잡았다, 물을 입에 넣고 먹을 만큼만 먹고 '스톱' 하고 멈춥니다. 왜 멈춥니까? 느낌으로 압니다. 이렇게 느낌 없이는 그것을 멈추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몸의 느낌이라 해서 '웨다나 까야(vedanā kā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이 느낌에 집중들을 합니다. 

또한 이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들을 만드는 장소이기도 하고, 번뇌를 만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느낌을 잘 관찰하지 않으면 '나가 있다'하는 생각을 하게 하고, 번뇌가 들끓어서 그 번뇌에 인해서 내가 잘못된 행위들을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가을이니까 요즘은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아! 저거는 붉은색 코스모스구나' 하고 아는 것도 느낌으로 아는 겁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코스모스가 마음으로 '아! 붉은색 코스모스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느낌으로 먼저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붉은색 코스모스가 '아! 이게 붉은색 코스모스다'하고 느끼는 것은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느낌들하고 합해져서 그것을 취하기 때문에 '붉은색 코스모스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 취하는 것도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취해버릴 것 같으면 마음은 이미 더러워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처음에 산에서 출발한 물은 더러워져 있질 않습니다. 그런데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여러 가지 더러운 것으로 인해서 강은 흘러가고 있지만 더러워져 있습니다. 우리의 느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취하는 것들도 느낌이고, 집착하는 것들도 느낌입니다. 그 집착하고 집착하고 하는 것들이 흐름으로써 쭈욱 흘러가고 있는 것들, 일반적으로 살아있다고 하는 것들도 어떤 면에서는 느낌입니다. 

망상하고 질투하고 화내고 하는 것들도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은 참 우리가 알기 쉽습니다. 눈으로 보면 느껴지는 거고 몸에 손을 대보면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느낌이라는 것은 영혼은 아닙니다. 

감각이라는 것은 접촉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눈이 대상과 접촉하고, 손이 대상과 접촉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손을 대면 일어나기 때문에 고정된 느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손이 닿아있기 때문에 느낌이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컵을 보면 컵의 위쪽에 대면 느껴지는 느낌들하고 아래쪽에 대면 느껴지는 느낌들이 또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느낌들을 우리는 구분하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컵에서 손을 떼어버리면 느낌은 사라져버립니다. 

원인이 없어지면 느낌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엄밀하게 보면 '나'라고 하는 것들도 이 느낌일 뿐입니다. 그래서 느낌을 아는 사람은 '나가 있다' '자아가 있다'하는 어리석은 사고는 가지질 않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느낌을 실제 일어난 것들을 그대로 아는 것들입니다.


어떻게 그럼 실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는 것인가?

강의 상류에서 관찰하는 겁니다. 이미 밑으로 내려와서 갖가지가 더러워진 강을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아예 댐을 만들어서 그것을 관찰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보이면 '보임' '보임'으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지 '아, 코스모스다'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코스모스다'하고 관찰할 때는 이미 내가 다른 느낌들, 다른 것들이 합해져서 코스모스다 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일어난 것들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수행의 세계이고 진리의 세계입니다.

걷는 것도 느낌의 탓이고, 생각하는 것도 느낌의 탓입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그렇게 느낌을 관찰하지 않으면, 질투하면 그런 느낌이 일어나서 쭉 질투해버리고, 망상하면 그런 느낌들이 일어나서 쭉 망상을 하게 됩니다. 

느낌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느낌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뿐입니다.

손을 대면 느낌이 일어났다가 손을 떼면 느낌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느낌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실체가 없습니다. 

망상이나 질투나 하는 것들도 느낌인 것을 분명하게 저번 시간에 얘기했으면, 이것이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렇게 관찰할 거 같으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느낌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지만 원인이 제거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번뇌나 분노나 미움이나 이런 것들도 똑같은 느낌일 뿐이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느낌을 이해하기 때문에 어리석지 않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명을 제거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느낌에는 통상적으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에서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을 수행대상으로 일차적으로 해서 수행을 해나갑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관찰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관찰대상으로 처음에는 잡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을,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대상으로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괴로운 느낌을 봅시다.

괴로운 느낌은 두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몸이 괴로운 거하고 마음이 괴로운 것. 육체적인 괴로움과 정신적인 괴로움이라고 그럽니다. 느낌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명확하게 확정할 수 있으면 그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아픈 장소를 찾을려고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 마음이 괴로운 겁니다.


보통 불교 용어에서 '고뇌'라고 하는 '도마낫사(domanassa)'라는 용어를 '정신적인 괴로움'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고뇌! 

사실은 육체는 괴롭지 않습니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정신이 없는 육체는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은 아픔도 괴로움도 없는 겁니다. 감각이 없으니까, 느낌이 없으니까! 

이렇게 따졌을 경우에 우리가 괴로움이라고 하는 거는 정신적인 괴로움이라 하는 겁니다. 정신적인 괴로움! 육체적으로 육체가 괴롭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아는 것은 마음으로 아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사리불 존자가 출가를 하고 나서 부처님을 시봉을 할 때입니다.

부처님한테 이교도들이 와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질문을 하는데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스님이 얘기하듯이 이렇게 느낌은 정신적인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이해가 안 됐을 겁니다. 

이교도들은 당연히 이해를 못합니다. 몸이 아픈 거지 왜 마음이 아픈 거냐? 몸이 지금 당장 내가 통증이 있고, 몸이 지금 당장 내가 절단되어가지고 몸이 아픈 것이지, 왜 몸이 아픈 것은 정신적으로 아는 것뿐인 것이지 몸이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느냐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부처님은 "그게 아니다. 마음으로 아픔 괴로움을 아는 것이다." 괴로움을 아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라고 얘기를 하는데 못 알아듣거든.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부채질을 쭉 합니다.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부채질을 하는 겁니다. 부채질을 하니까 당연히 땀이 뻘뻘뻘뻘 흐릅니다. 괴롭습니다. 부채질 하는 것이. 그런데 가만히 자기의 마음을 보니까 부채질하는 것에 열중을 할 때는 그 괴로움이 없거든. 그런데 부채질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부채질할 때는 괴로운 거라. 똑같이 괴로움이 있는데 어떨 때는 괴로움을 알고 어떨 때는 괴로움을 모르거든. 

아! 느낌은 순간순간 바뀌는 것이고 내가 접하는 정보에 따라서 그렇게 괴롭다고 느끼기도 하고 또 즐겁다고 느끼기도 하는구나. 괴로움이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즐거움이라는 것이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구나. 나의 마음에 따라서 이렇게 바뀌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겨울에 얼음을 누가 몸에다 탁 갖다 대어 보십시오. 괴롭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얼음인데 내가 감기가 들어서 열이 펄펄 나는 상태에서 얼음을 댈 것 같으면 좋습니다.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행복합니다. 어떤 것은 괴로움으로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즐거운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괴로움으로 받을 것인지 즐거움으로 받을 것인지는 이렇게 내 마음의 작용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대상에 대해서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든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기분에 따라서, 나의 느낌에 따라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그 느낌은 그 어떤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실체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괴로움은 괴로움이 되어야 되고 즐거움은 즐거움이 되어야 됩니다. 그런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에 어떨 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즐겁게 받아들이고, 어떨 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은 괴롭게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느낌은 이와 같이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느낌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더 늘리고 싶어 하고, 괴로운 느낌은 없앨려고 하는 그런 노력으로 평생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애가 공부 잘해야 되는 것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대부분이 보면 즐거운 느낌을 더 많이 가질려고 하고 괴로운 느낌을 줄일려고 하는 이 한 가지 목적에서 대부분이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면 "일체사, 모든 일들은 느낌으로 귀결된다." 하고 한마디로써 딱 얘길 해놔 놨습니다. 


그런데 이 느낌은 강이 위에서 내려올 때 물들지 않았다가 점차 오염되고 하듯이 첫 단계일 때 색깔이 없는 상태에서 알아차릴 것 같으면 거기서 그쳐버립니다. 즐겁다, 괴롭다, 아니면 무덤덤하다, 하고 알아차릴 거 같으면 거기서 그쳐버리는데, 거기다가 감정이나 의도나 하는 것들이 첨가되면서 비로소 욕망 싫어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들이 반드시 이런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알아차려버릴 거 같으면 거기서 그쳐버립니다. '즐겁다 괴롭다' 하는 것으로 그쳐버리지, 그것이 '좋다 싫다 밉다 걱정하고' 이런 것으로써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혼합되는 것들을 느낌으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좋고 싫고 두렵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된다 하는 겁니다.

실제로 하루 종일 우리는 많은 느낌들을 받는데 아주 미세한 것들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느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 느낌들은 큰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흘러가버립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강하게 일어나는 느낌들은 다른 것들과 결합해서 좋고 싫은 것들로써 우리에게 와 닿는 것뿐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 느낌들은 그런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느낌들은 하루종일 있습니다. 

대부분은 큰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느낌을, 크게 오는 느낌이든 미세하게 오는 느낌이든 그 느낌으로써만 느낌의 단계에서만 멈추게 만들 수 있다 할 거 같으면 더 이상의 감정적인 것으로 발전하지 않고 우리는 거기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알아차림과 자기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만 있다고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어나갑니다. 실제 경험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느낌의 대목에서 멈출 수 있고, 느낌의 뒤를 이어서 갈망하고 갈애하는 것이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 하는 그런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느낌이야말로 그래서 부처님이 해탈에 이르는 주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마만큼 수행에서 느낌에 대한 관찰은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은 일상생활에서 잊지 않고 적용을 해야 됩니다. 특히나 느낌이 선하지 않은 감정으로 바뀌려고 할 때 반드시 놓치지 않고 마음 챙겨야 합니다. 미세한 느낌들은 느낌으로 존재를 대부분 합니다. 그런데 크게 오는 느낌들은 다른 감정과 뒤섞여서 오기 때문에 그 느낌이 좋고 싫은 느낌으로써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수행을 할 때는 그렇게 오는 느낌 중에서 선하지 않은 것, 악한 감정으로 바뀔려고 할 때 반드시 놓치지 않고 마음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관찰은 항상 통증이나 악한 감정 이런 것들을 먼저 수행의 대상으로써 잡아나가야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느낌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변해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느낌일 뿐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느낌, 괴로운 느낌들, 즐거운 느낌들, 이런 느낌들을 관찰하는 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s://cafe.naver.com/buddhayana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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